# 심야의 공동묘지, 처녀 귀신 행세로 얻어낸 정략결혼
심야의 공동묘지, 처녀 귀신 행세로 얻어낸 정략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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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마음에 드는 청년과 혼인하고 싶은데 집안이 반대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똑똑한 처녀는 한밤중 공동묘지에서 직접 귀신이 되기로 했습니다. 마을 전체가 뒤집어진 그날 밤의 대소동, 지금부터 들어보시겠습니까?
※ 1: 마음에 품은 청년, 막힌 길
봄볕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어느 마을, 울타리마다 진달래가 피어나고 개울가 버들가지가 연두빛으로 물드는 계절이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제법 글도 읽고 살림 솜씨도 좋다고 소문난 처녀가 있었으니, 바로 이 참봉 댁 딸 이옥란이었습니다. 나이는 열여덟, 눈썹이 또렷하고 눈빛이 총명했으며,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하고야 마는 성격이라 집안 어른들에게 늘 핀잔을 들었지만, 그 핀잔도 오래가지 않을 만큼 영리하고 붙임성이 있는 처녀였습니다.
그런 옥란이 요 몇 달 사이 부쩍 밥도 잘 안 먹고,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마당을 쓸다가도 멈추고, 바느질을 하다가도 실을 놓치기 일쑤였습니다. 같이 사는 할머니가 이마를 짚어보고 의원을 불러야 하나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이웃 마을 청년 박도훈이었습니다.
박도훈은 나이 스물하나,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과묵하지만 한번 입을 열면 조리 있게 말하는 청년이었습니다.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고, 마을 어른들께 예를 잘 갖추는 데다가, 길에서 아이들이 넘어지면 달려가 일으켜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옥란은 지난 봄 장터에서 처음 도훈을 본 이후로, 그 청년의 넓은 어깨와 조용한 눈빛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런 사람이라면 평생을 같이 살아도 좋겠다. 아니, 평생을 같이 살고 싶다.'
옥란은 결심을 굳히고 어느 날 저녁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어머니, 이웃 마을 박 씨 댁 아들 도훈이라는 청년 아십니까?"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다 말고 눈을 들었습니다.
"박 씨 댁? 거기는 논밭도 별로 없는 집 아니냐."
"논밭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 됩됩이가 좋다고 들었습니다. 마을 어른들도 칭찬이 자자하고요."
"됩됩이가 좋으면 밥이 나오냐, 옷이 나오냐. 이 참봉 댁 딸이 가진 것 없는 집에 시집을 가면 마을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 네 체면도 있고 우리 집안 체면도 있지."
"마을 사람들 눈이 중요합니까, 제 평생이 중요합니까?"
"이 아이가! 어른 앞에서 말버릇 좀 봐! 평생 타령은 나이 들어서 해!"
옥란은 입술을 꾹 다물었습니다. 아버지께도 넌지시 말을 꺼내보았지만, 이 참봉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됩됩이로 배를 채우냐. 내가 다음 달에 맞선 자리를 알아봐 놓을 테니 그리 알아라. 가진 것도 있고 집안도 반듯한 곳으로."
맞선이라는 말에 옥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끌어안고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녁 바람이 창호지를 흔들었습니다. 먼 데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안 된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 어른들이 집안 형편 때문에 반대하신다면, 집안 형편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이 혼사가 성사되게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옥란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이 꼼짝 못 하는 이유라면 딱 하나였습니다. 하늘의 뜻.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집안 어른들도 함부로 거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완고한 어른도 하늘의 뜻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의 뜻을 만들어낼 것인가. 옥란은 머릿속을 빠르게 굴렸습니다. 눈이 점점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뒷산 기슭에는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밤에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었고, 그 옆 샛길은 이웃 마을로 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도훈이 이웃 마을 친척 집에 다녀올 때 반드시 그 샛길을 지난다는 것을 옥란은 진작에 파악해 두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귀신이 나타나 도훈에게 인연을 점지해 주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어른들도 함부로 반대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옥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래. 귀신이 되어보자.'
※ 2: 처녀 귀신 탄생 계획
옥란이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어릴 적부터 단짝인 친구 순덕이었습니다. 순덕은 옥란과 달리 겁이 많고 걱정이 앞서는 처녀였지만, 옥란의 부탁이라면 어지간해서는 거절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옥란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순덕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옥란은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순덕아,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엄청난 비밀이야."
순덕이 바느질을 내려놓으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뭔데? 설마 도훈 씨 이야기야?"
"어떻게 알았어?"
"요즘 네 얼굴만 보면 다 알지. 밥도 잘 안 먹고, 멍하니 있고. 그래서 어쩌려고?"
옥란은 순덕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귀에 대고 작전을 속삭였습니다. 순덕의 표정이 듣는 내내 점점 굳어갔습니다. 눈이 점점 커지더니, 다 듣고 나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습니다.
"공동묘지에서 귀신 행세를 하라고?"
"응."
"밤중에?"
"당연히 밤중에 해야지, 낮에 귀신이 어딨어."
"이옥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나는 귀신도 무서운데 귀신 행세를 하라고?"
"무섭긴 뭐가 무서워. 네가 귀신인데."
"내가 귀신이면 진짜 귀신도 있을 수 있잖아! 같은 장소에!"
"귀신이 귀신한테 뭘 어떻게 해. 동업자끼리."
"동, 동업자?!"
순덕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옥란을 바라보았습니다. 옥란은 순덕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습니다.
"순덕아, 나 이 혼인 못 하면 진짜 평생 한이 될 것 같아. 너밖에 없어. 집안 어른들 설득하려면 하늘의 뜻이라는 소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저절로 생기겠어? 우리가 만들어야지. 응? 응?"
순덕이 입술을 실룩거렸습니다.
"...나는 뭘 하면 돼?"
옥란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습니다. 다음 주 보름달 뜨는 날, 도훈이 친척 집에 다녀오는 날이 마침 겹쳤습니다. 그날 밤 공동묘지 옆 샛길에 옥란이 흰 옷을 입고 서 있고, 순덕은 근처 풀숲에 숨어 바람 소리와 풀잎 스치는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잡아주기로 했습니다.
"나는 소리만 내면 되는 거지?"
"응. 스스스, 바람 부는 소리. 그리고 가끔 나뭇잎 흔드는 소리. 그것만 해줘."
"그것만?"
"그것만. 절대 나오지 말고."
"나올 생각 없어. 풀숲에서 죽어도 안 나와."
다음은 의상 준비였습니다. 옥란은 낡은 흰 모시 저고리를 꺼내 치마와 함께 맞춰보았습니다. 머리는 풀어헤쳐야 제대로 된 귀신 모양이 날 것이었습니다. 얼굴은 달빛 아래서 창백하게 보이도록 쌀가루를 바르기로 했습니다.
"얼굴에 쌀가루를 발라?"
"귀신이 혈색 좋으면 이상하잖아."
"쌀가루 귀신이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네."
"새로운 시대의 귀신이지, 뭐."
순덕이 쌀가루 통을 들고 옥란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발라주었습니다. 등잔 앞에서 옥란이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쌀가루를 바른 얼굴은, 순덕이 솔직히 인정할 만큼 꽤 무섭게 보였습니다. 순덕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낮게 질렀습니다.
"야, 야! 너 진짜 무섭다! 나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그래? 잘됐다."
"잘됐다니! 나 방금 진짜 놀랐다고!"
"도훈 씨도 그 정도로 놀라면 딱 좋은 거야."
옥란은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보았습니다. 거울 속 모습이 스스로도 살짝 무서웠지만, 그보다 기대감이 더 컸습니다.
"됐어. 준비 완료야."
"나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됐는데."
"안 됐어도 해야 해."
순덕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옥란, 나중에 잘 살아야 해.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게 헛되면 안 되니까."
"잘 살 게. 잔칫상 꼭 차려줄게."
"한 번이 아니라 매년이야."
"알았어, 매년."
순덕이 또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숨 끝에 작은 웃음이 섞여 있었습니다.
'도훈 씨, 준비하세요.'
※ 3: 한밤의 공동묘지 대소동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이었습니다. 달빛이 어찌나 밝은지, 온 마을의 지붕과 길과 나무들이 낮처럼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 달빛 아래, 공동묘지 입구 근처 소나무 사이에는 흰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옥란이 납작하게 엎드려 숨어 있었습니다. 뒤쪽 풀숲에는 순덕이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옥란아, 나 지금 다리가 떨려."
"긴장하지 마. 분위기 때문에 그런 거야."
"긴장이 아니라 무서운 거야. 저기 비석 봤어? 달빛에 비치는 거."
"보지 마."
"어떻게 안 봐, 자꾸 눈이 가는데."
"순덕아, 제발 집중해줘. 곧 도훈 씨 오실 시간이야."
옥란은 저고리 매무새를 다시 여미고 머리카락을 얼굴 앞으로 쓸어내렸습니다. 숨을 고르게 가다듬었습니다. 달빛이 쌀가루 바른 얼굴에 내려앉아 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옥란은 몸을 바짝 낮췄습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확인하려는 순간,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발소리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둘이었습니다.
'어? 도훈 씨 혼자 오신다고 했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의 주인공은 도훈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어귀 주막집 아저씨 최덕배와, 그 옆집 홀아비 강 서방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주막에서 막걸리를 몇 사발 걸치고 비틀비틀 걸어오는 참이었는데, 공동묘지 옆 샛길이 마을로 돌아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입니다.
옥란은 소나무 뒤에 얼른 몸을 납작하게 붙였습니다. 두 사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최덕배가 바로 옥란이 숨은 소나무 옆에서 걸음을 뚝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강 서방, 나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세. 다리가 아파서."
"주막에서 막걸리를 몇 사발이나 마셨다고 다리가 아파요?"
"나이가 들면 다 그렇다네. 자네도 더 있으면 알아."
최덕배가 소나무에 등을 기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달빛에 비친 흰 옷자락과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최덕배의 입이 소리도 없이 딱 벌어졌습니다.
"강, 강 서방..."
"왜요?"
"저, 저기..."
최덕배가 손가락으로 옥란을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강 서방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얼굴, 축 늘어진 머리카락, 소나무에 붙어 있는 흰 옷자락.
"으아아아아아!"
두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왔던 길로 냅다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다리가 아프다던 최덕배가 강 서방보다 두 발은 앞서 달렸습니다. 막걸리가 이렇게나 빨리 깨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발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옥란은 소나무 뒤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습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느라 눈물이 맺혔습니다. 풀숲에서 순덕도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습니다.
"야... 저 아저씨들 달리는 거 봤어?"
"다리 아프다더니 엄청 빠른데."
"막걸리가 날개를 달아줬나 봐."
두 사람이 소리 없이 웃고 있는데, 다시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에는 하나였습니다. 흔들림 없이 일정한 발소리였습니다. 옥란은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머리카락을 얼굴 앞으로 쓸어내리고,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습니다. 순덕이 약속대로 바람 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습니다.
"스스스스..."
발소리가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스무 걸음, 열 걸음. 옥란은 숨을 참고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달빛 아래 키 큰 그림자가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넓은 어깨, 보자기 하나를 손에 든 청년.
박도훈이었습니다.
옥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드디어 왔습니다. 옥란은 눈을 반쯤 감고 팔을 더 축 늘어뜨렸습니다. 달빛이 쌀가루 바른 얼굴에 정확하게 내려앉았습니다. 완벽한 귀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도훈의 발소리가 다가오다가, 멈췄습니다.
옥란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이제 비명을 지르거나, 아니면 뒤돌아 도망을 치거나 할 것이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훈은 비명도, 도망도 없었습니다. 멈춰 선 자리에서 옥란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한 발짝 앞으로 걸어왔습니다.
'어?'
옥란은 속으로 눈을 껌뻑였습니다.
도훈이 또 한 발짝 걸어왔습니다. 이제 서너 걸음 거리였습니다. 달빛에 도훈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겁먹은 표정도, 놀란 표정도 아니었습니다. 무언가를 천천히 살피는, 그 조용한 눈빛이었습니다.
옥란은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이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 4: 도훈의 담력과 뜻밖의 전개
달빛이 소나무 사이로 비스듬히 내려앉은 그 자리에서, 박도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한 발짝씩 옥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손에 든 보자기가 살랑살랑 흔들렸습니다. 옥란은 팔을 더욱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옆으로 더 기울이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버텼습니다.
'멈춰요, 멈추라고요. 왜 계속 오는 거예요.'
도훈이 서너 걸음 앞에서 드디어 멈췄습니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이 마주 선 채로 잠시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풀숲에서 순덕이 약속대로 바람 소리를 냈습니다.
"스스스스..."
그런데 도훈이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옥란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습니다.
"거기 계십니까?"
옥란은 속으로 눈을 껌뻑였습니다.
'귀신한테 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나 옥란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최대한 낮고 느리게 깔았습니다.
"...이 밤에 왜 이 길을 지나십니까."
도훈이 잠깐 멈추더니 자연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친척 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이 길이 지름길이라서요."
옥란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습니다. 귀신이 말을 거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옥란은 머릿속을 빠르게 굴렸습니다.
'어떻게 해. 그냥 으스스하게 웃고 사라지면 되나. 그런데 이 사람이 도망을 안 가잖아. 안 가면 소문이 제대로 안 날 텐데.'
도훈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쪽 묘지에 아는 분이 계십니까?"
옥란은 눈이 휘둥그레질 뻔했습니다. 귀신한테 아는 분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 옥란은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며 즉흥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마을의 인연을 살피는 존재입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며 하늘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밤이 꽤 차가운데, 그렇게 얇은 옷을 입고 계시면 춥지 않으십니까?"
옥란은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죽을힘을 다해 참았습니다. 귀신한테 춥지 않냐고 걱정을 하다니. 이 청년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사람인 것입니까.
바로 그때, 풀숲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흡."
순덕이 웃음을 참다가 그만 풀잎을 잘못 밟아 바스락 소리를 낸 것이었습니다. 도훈이 고개를 돌려 풀숲을 바라보았습니다.
"저쪽에도 계십니까?"
풀숲에서 숨 죽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옥란은 재빨리 도훈의 시선을 돌렸습니다.
"저 혼자입니다. 바람 소리입니다."
"바람치고는 숨소리가 들리던데요."
'이 사람, 너무 예리한 거 아니야?'
옥란은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러다가 정체가 들킬 것 같았습니다. 얼른 마무리를 지어야 했습니다. 옥란은 팔을 천천히 들어 도훈을 향해 뻗었습니다. 목소리에 있는 힘껏 신비로운 울림을 실었습니다.
"청년, 잘 들으십시오. 당신 앞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처자가 있으니, 그 인연을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도훈이 천천히 물었습니다.
"어느 집 처자입니까?"
옥란은 잠깐 멈칫했습니다.
'직접 말하면 너무 티가 나는데. 어떻게 돌려서 말하지.'
"이 마을에서 가장 총명한 처자입니다. 눈빛이 또렷하고,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는 처자입니다."
도훈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옥란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그런데 도훈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귀신의 저고리 귀밑에 쌀가루가 묻는 법이 있습니까?"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옥란의 숨이 딱 막혔습니다. 풀숲에서도 소리가 완전히 끊겼습니다.
도훈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따뜻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달빛에 보였습니다. 귀밑에 하얗게 묻어 있습니다."
옥란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비었습니다.
그때 도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히 따뜻한 말투로 말했습니다.
"많이 추우셨겠습니다. 들어가 계십시오."
그리고 도훈은 보자기를 고쳐 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발소리가 일정하게, 흔들림 없이 멀어졌습니다. 달빛만이 그 빈자리에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옥란은 소나무에 등을 기대며 힘이 쭉 빠졌습니다. 온몸에서 긴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순덕이 풀숲에서 기어나왔습니다.
"야. 들킨 거야, 안 들킨 거야?"
옥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달이 둥글고 환했습니다.
"모르겠어."
"쌀가루 귀신이라니까. 내가 뭐라 했어."
옥란은 귀밑에 묻은 쌀가루를 손으로 닦으며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피함보다 다른 감정이 더 크게 올라왔습니다. 들킨 것 같은데 모른 척 넘어가 준 도훈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많이 추우셨겠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오늘 밤 가장 무서운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서운 게 아니라, 가슴이 뛰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 5: 소문은 날개를 달고
다음 날 아침, 마을은 평소처럼 조용하게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옥란은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면서 슬쩍슬쩍 바깥 동정을 살폈습니다. 어젯밤 최덕배 아저씨와 강 서방이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를 입 밖에 낼지, 그것이 관건이었습니다.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오다 귀신을 봤다는 것이 창피해서 입을 다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옥란은 그 두 사람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말을 참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과연 점심 무렵이 되자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최 아저씨가 어젯밤에 공동묘지에서 귀신을 봤대요!"
"강 서방도 봤다더군요! 흰 옷에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래요!"
"어머, 무서워라. 대낮에 들어도 소름이 돋네요."
마을 아낙들이 우물가에서 모여 수군거렸습니다. 최덕배는 주막에 앉아 어젯밤 이야기를 신이 나서 늘어놓고 있었는데,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오다가 봤다는 부분은 어느새 쏙 빠지고, 그냥 늦게 집에 돌아오던 중이었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눈이 이만 했다니까요!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서 있는데, 달빛에 얼굴이 새하얗더라고요! 소름이 쫙 돋았다니까!"
"도망가셨습니까?"
"도망이요? 나는 그냥 놀라서 자리를 피한 겁니다. 도망이 아니라 피한 거예요. 전혀 다른 겁니다."
"같은 말 아닙니까요?"
"아닙니다! 전혀 다릅니다!"
옥란은 담장 너머로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소문의 첫 번째 불씨가 제대로 붙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단계였습니다. 옥란은 순덕을 불러 도훈도 그날 밤 그 길을 지나쳤다는 사실을 슬쩍 흘리도록 했습니다.
순덕이 우물가에서 아낙들 사이에 능청스럽게 끼어들었습니다.
"어머, 그런데 있잖아요. 박 씨 댁 도훈 씨도 어젯밤에 그 길을 지나갔다고 하던데요."
"어머, 진짜요? 도훈 씨는 괜찮았대요?"
"멀쩡하셨다고요. 귀신을 봤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셨다고 하던걸요."
"어머나! 담력이 보통이 아니시네!"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습니다. 사람의 입을 거칠수록 이야기는 살이 붙었습니다. 귀신을 봐도 태연했다는 도훈의 이야기가 마을 곳곳으로 번져나가면서, 하루가 지나자 이렇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귀신이 도훈 씨한테 직접 말을 걸었다더군요."
"말을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있다고, 이 마을에서 좋은 처자를 만날 것이라고 했다더래요."
"세상에! 그게 하늘의 뜻이 아니면 뭐겠어요!"
옥란은 방 안에서 그 소문을 전해 듣고 혼자 빙그레 웃었습니다. 계획의 절반이 이미 성공이었습니다. 이제 이 소문이 집안 어른들의 귀에 닿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저녁, 이 참봉이 마을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더니 안방에 앉아 수염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보, 공동묘지 귀신 이야기 들었소?"
어머니가 바느질을 내려놓았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박 씨 댁 도훈 씨한테 인연을 점지해 줬다는 이야기 말씀이시지요?"
"그 이야기가 심상치 않소. 마을 어른들도 다들 하늘의 뜻이 아니겠냐고 하던데. 귀신이 나타나 직접 인연을 점지해 준 것이 보통 일이 아니지 않겠소."
방문 너머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옥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습니다. 두 주먹이 절로 쥐어졌습니다.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뭐... 하늘의 뜻을 사람이 거스를 수는 없지 않겠소."
옥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방 안에서 두 발을 살짝 구르며 기쁨을 참았습니다.
다음 날 오전, 박 씨 댁에서 이 참봉 댁으로 사람이 왔습니다. 도훈의 어머니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마을 어른들에게 아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도훈의 어머니는, 이것이 하늘이 내린 인연임을 굳게 믿고 온 참이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을 갖춘 것도 복이지만, 하늘이 직접 인연을 점지해 주셨다니 저도 감격했습니다. 이 참봉 댁 따님이 마을에서 제일 총명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 참봉이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만졌습니다.
"하늘의 뜻이라면 저희도 거스르기 어렵지요. 한번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옥란은 안방 문 너머에서 그 소리를 듣다가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창문 너머 파란 봄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다 됐다. 정말 다 됐어.'
그런데 기쁨 속에서도 자꾸만 어젯밤 도훈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귀신인 줄 알면서도 차분하게 존댓말을 썼던 목소리. 쌀가루가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준 따뜻한 말 한마디.
많이 추우셨겠습니다.
옥란은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괜히 창문을 닫았습니다. 바람이 살랑 불어와 창호지를 흔들었습니다.
※ 6: 노부부의 달콤한 고백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봄볕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어느 오후, 마을 한쪽에 자리 잡은 아담한 집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그 아래 평상에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된 옥란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지만, 눈빛만큼은 예전 그대로 총명하게 빛났습니다. 할아버지가 된 도훈은 머리카락이 많이 줄었고 허리가 약간 굽었지만, 그 넓은 어깨는 여전히 듬직했습니다.
평상 앞에는 손자 손녀 넷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가장 큰 손자가 열두 살이었고, 막내 손녀가 여섯 살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오늘 서당에서 선생님께 할머니 할아버지 혼인 이야기를 들었다며, 직접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공동묘지에서 귀신을 봐도 안 도망갔다는 게 진짜예요?"
옥란이 도훈을 슬쩍 곁눈질했습니다. 도훈은 감나무 위를 올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뭐, 그런 이야기가 있지."
"귀신이 할아버지한테 할머니랑 인연이라고 점지해 줬다면서요?"
"그런 이야기를 들었구나."
"진짜예요? 진짜 귀신이에요?"
옥란이 잠시 뜸을 들였습니다. 감나무를 올려다보는 도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습니다.
"있잖아, 얘들아. 오늘 할머니가 수십 년 동안 아무한테도 말 안 한 비밀 하나를 이야기해 줄까?"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비밀이요?"
"응. 진짜 비밀이야. 이 마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모르는 비밀."
도훈이 그제야 감나무에서 눈길을 거두고 옥란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보, 설마."
"이제 말해도 되지 않겠어요? 손자 손녀들인데요."
"수십 년이 지났소."
"수십 년이 지났으니까 말해도 되는 거지요."
도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숨 끝에 희미한 웃음이 묻어 있었습니다.
옥란은 손자 손녀들을 한 번씩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그날 밤 공동묘지의 귀신은 말이야."
"예?"
"할머니였단다."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습니다.
"네에?!"
"흰 옷 입고, 머리 풀어헤치고, 얼굴에 쌀가루 바르고, 소나무 옆에 서 있었던 거야. 귀신은 귀신인데, 이승에 멀쩡히 살아있는 귀신이었지."
둘째 손자가 눈을 껌뻑이며 물었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할머니가 꾸민 거예요?"
"할아버지가 마음에 드는데 집안 어른들이 반대하시니까,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소문을 직접 만들기로 한 거지. 어른들이 하늘의 뜻이라는 말에는 꼼짝 못 하신다는 걸 알았거든."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할머니 진짜 대단하다! 그 생각을 어떻게 했어요?"
"할머니가 좀 특별하지."
막내 손녀가 도훈을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몰랐어요? 귀신이 할머니인 줄?"
도훈이 아주 천천히, 조용히 웃었습니다.
"알았지."
이번에는 옥란이 눈을 껌뻑였습니다.
"여, 여보?"
"귀밑에 쌀가루가 묻어 있다고 직접 말했잖소."
"그건 그때 알아챘다는 거고, 처음부터 알았냐고요."
"처음부터 알았소."
"처음부터요?"
도훈이 조용히 말을 이었습니다.
"귀신이라면 달빛을 등지고 서야 얼굴이 어둡게 보이는 법인데, 그 귀신은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서 있었소. 달빛이 얼굴에 잘 비치도록 각도를 잡은 거지요. 그게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첫 번째 증거였소."
옥란이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걸 그때 알아챘어요?"
"그리고 귀신치고는 숨소리가 들렸소. 긴장한 사람이 숨을 참을 때 나는 소리가 있거든요."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큰 손자가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처음부터 알면서 모른 척한 거예요?"
"모른 척이라기보다는, 마저 하게 두고 싶었소."
옥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담력 있게 존댓말 쓰고, 춥지 않냐고 걱정하고, 그게 다 알면서 한 거예요?"
"귀신한테도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겠소."
"이 사람이!"
옥란이 도훈의 팔을 가볍게 때렸습니다. 아이들이 또 와르르 웃었습니다. 막내 손녀가 배꼽을 잡고 구르다가 간신히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섭지 않았어요? 처음에는요?"
도훈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장터에서 본 처자가 생각났소."
옥란의 눈이 커졌습니다.
"장터요?"
"귀신 작전 전에, 장터에서 먼저 봤소. 어쩌다 눈이 마주쳤는데, 도망가지 않는 눈빛이더군요. 그 눈빛을 가진 처자가 귀신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 그러면 공동묘지에서 저를 알아본 거예요?"
"확신은 없었소. 그런데 총명한 처자라는 설명을 들으니까 확신이 생겼지요."
옥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이, 오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고 또 새로웠습니다.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괜히 먼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이제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제라도 하면 되지요."
큰 손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진짜 하늘이 맺어준 인연 아니에요? 둘 다 서로 보고 있었으니까요."
옥란과 도훈이 동시에 손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습니다.
"그 말이 맞구나."
"역시 우리 손자야."
봄바람이 살랑 불어와 감나무 잎을 흔들었습니다. 마당 가득 웃음소리가 넘쳤습니다. 노부부의 손이 평상 위에서 자연스럽게 포개졌습니다. 쌀가루 귀신이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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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쌀가루 귀신이 된 옥란의 용기, 알면서도 모른 척해준 도훈의 따뜻함,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두 사람의 사랑. 어떠셨나요? 사랑은 때로 이렇게 엉뚱하고 용감한 모습으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좋아요와 구독으로 응원해 주시고, 다음 이야기에서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