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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으로 꿰뚫는 무당의 선택 『기문총화』

조선남녀 2026. 7. 14. 15:14

관상으로 꿰뚫는 무당의 선택 『기문총화』

태그(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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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사람의 얼굴만 보아도 그 길흉화복이 훤히 내다보이는 신통한 무녀. 하지만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추악한 민낯에 지쳐가던 어느 날, 흙먼지 날리는 장터에서 범상치 않은 관상을 가진 가난한 총각을 발견한다. '내 남은 운명을 저 사내에게 걸어보리라.' 신기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은밀하고도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조선 제일의 거상이 되어가는 한 남자의 기상천외한 인생 역전이 지금 펼쳐집니다.

※ 1: 장터의 기운, 운명을 발견한 무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향내음 사이로, 오늘따라 유난히 역겨운 인간들의 욕망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한양 도성에서 제일간다는 신통한 무녀.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 한 번 보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천금을 싸 들고 와 자신의 명줄을, 부귀영화를 구걸했다. 화려한 신복을 입고 방울을 흔드는 그녀의 눈앞에 엎드린 자는,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는 사대부 양반이었으나 그녀의 눈에 비친 그의 관상은 썩은 물이 고여 악취가 나는 시궁창과 다를 바 없었다.

"대감의 명줄은 길고도 질기나, 그 끝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오.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어 쌓은 재물이 어찌 대감의 자식들에게까지 평안히 이어지길 바라십니까."

"이, 이년이! 감히 뉘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듣기 싫거든 당장 나가시지요. 복채는 필요 없으니."

호통을 치며 노발대발하는 양반의 등 뒤로 문이 쾅 닫히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화려한 신복을 벗어 던졌다. 사람의 얼굴에 깃든 기운만으로도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 뼛속 깊은 심성까지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녔건만, 정작 그녀 자신의 삶은 텅 비어버린 지 오래였다.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을 매일같이 마주하다 보니, 삶에 대한 회의감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이 지긋지긋한 무당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었으나, 신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평범한 여인의 차림으로 변복을 한 채 무작정 집을 나섰다. 왁자지껄한 운종가 장터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물건들로 활기가 넘쳤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이마와 미간 사이에 서려 있는 탁한 기운들만 보일 뿐이었다. 사기꾼의 얄팍한 입술, 도둑의 음흉한 눈매, 탐욕에 찌든 상인의 처진 눈초리. 어디를 둘러보아도 맑은 기운을 가진 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차피 이승은 탐욕과 번뇌의 지옥인 것을. 내 어찌 이리 부질없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발걸음이 돌부리에 걸린 듯 우뚝 멈춰 섰다. 시끌벅적한 푸줏간 옆,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무거운 짐통을 지고 가는 한 사내. 남루한 베적삼은 땀에 찌들어 곳곳이 해져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얼굴에는 시커먼 때가 묻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장터 바닥을 뒹구는 흔해 빠진 짐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비친 사내의 관상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아니, 저럴 수가… 저런 관상이 어찌 이런 시궁창 같은 장터 바닥에 뒹굴고 있단 말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사내를 주시했다. 길고 짙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는 비록 피로에 지쳐 있었으나, 흑백이 분명하고 안광이 마치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는 범의 눈이자 용의 안광,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무리를 이끌어갈 제왕의 눈매였다. 콧대는 산맥처럼 곧고 힘 있게 뻗어 내려왔고, 콧방울은 재물을 한가득 머금은 두꺼비처럼 두툼하고 풍만했다. 입술의 선은 뚜렷하여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의를 담고 있었고, 턱은 넓고 단단하여 말년의 흔들림 없는 평안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맑고 거대한 황금빛 기운. 그것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진흙 속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이무기의 기운이었다. 하늘이 내린 부와 명예를 가질 상이 분명하건만, 사내는 자신의 운명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고단한 삶에 순응하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평생을 남의 운명만 읽어주며 껍데기처럼 살아온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열망이 솟구쳐 올랐다.

'하늘이 내게 주신 이 신기(神氣)… 이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써보리라. 저 사내라면, 저 사내의 숨겨진 날개를 내가 펼쳐준다면….'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는 짐통을 내려놓고 땀을 닦고 있는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섬세하고 흰 손이 사내의 거친 팔뚝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화들짝 놀란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뉘… 뉘신지요?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의 목소리는 투박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옷을 살짝 내리며, 붉은 입술을 열어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짐통, 이제 그만 내려놓으셔도 될 듯싶습니다. 당신은 평생 남의 짐이나 지고 살 관상이 아니니까요."

"예? 그게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인데, 갈 길이나 가시지요."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짐통을 메려 하자, 그녀는 더욱 바짝 다가가 사내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짙고 매혹적인 난초 향이 사내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늘 밤, 자시(子時)에 남산골 달동네 끝자락에 있는 기와집으로 찾아오십시오. 대문 앞에 청사초롱을 걸어둘 터이니. 당신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멈춰줄 방도를 알려드리지요."

"가, 가난을 멈춰준다니요? 당신이 누군데 그런 황당한 소리를…!"

"오고 안 오고는 당신의 선택입니다. 허나, 평생 흙먼지를 마시며 살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오셔야 할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사내는 그녀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의 팔뚝에 남은 여인의 부드러운 체온과 기묘한 향기에 취한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 2: 달빛 아래 맺어진 연, 기묘한 제안

어스름한 달빛이 내리는 밤. 자시(子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즈음, 사내는 남산골 끝자락을 서성이고 있었다. 낮에 들었던 여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미친 여자의 헛소리라 치부하려 했건만, 자신을 바라보던 그 깊고 강렬한 눈빛과 온몸을 휘감던 묘한 향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며 언덕을 오르던 그의 눈앞에, 정말로 청사초롱 하나가 외롭게 불을 밝히고 있는 고즈넉한 기와집이 나타났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대문을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잘 가꿔진 안뜰을 지나 방문 앞을 서성이는데, 안에서 나지막하고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켠 사내가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은 은은한 촛불 몇 개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정갈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낮에는 장옷에 가려 보지 못했던 여인의 자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늘하늘한 속적삼에 붉은 비단 치마만을 두른 그녀의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하얗게 드러난 목선과 가녀린 어깨, 요염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얼굴은 마치 달빛을 머금은 선녀 같기도, 사람을 홀리는 여우 같기도 했다.

"저… 정말로 저를 기다리신 겁니까. 대체 저같이 천한 놈에게 무엇을 원하시기에…"

"앉으세요. 우선 술부터 한잔 받으시지요."

사내가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자, 그녀가 사뿐히 다가와 백자 술병을 들었다. 쪼르르 맑은 술이 잔에 채워지는 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을 채웠다. 그녀가 건넨 술잔을 단숨에 들이켠 사내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기운에 취하는 듯했다. 아니, 술이 아니라 눈앞에 앉은 여인의 짙은 향기에 취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내 이름은 연화입니다. 한양 바닥에서 제법 이름난 무녀지요. 사람의 관상을 보고 길흉을 치는 것이 내 업입니다."

"무… 무녀라고 하셨습니까? 어쩐지, 사람의 기운이 아니더라니. 헌데 어찌 저를 부르신 겝니까?"

그녀가 사내의 거친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사내의 손끝이 그녀의 매끄러운 살결에 닿자 흠칫 놀랐으나, 그녀는 꽉 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의 얼굴에서 천하를 호령할 거상의 기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흙바닥을 기고 있으나, 당신은 장차 조선 팔도의 재물을 모두 쥐락펴락할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나는… 그 운명에 내 모든 것을 걸어보려 합니다."

사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 그토록 가난에 찌들어 살아왔건만, 자신이 거상이 될 운명이라니.

"허튼소리 마십시오. 당장 내일 먹을 쌀 한 줌이 없는 놈입니다. 무슨 수로 거상이 된단 말입니까?"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하늘의 뜻을 읽는 나의 눈과, 당신이 타고난 재물의 그릇. 이 둘이 합쳐지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천천히 몸을 기울여 사내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사내의 심장이 흉곽을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사내의 목덜미를 스치자, 등줄기를 타고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나와 은밀한 거래를 합시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남은 인생을 맡기세요. 나는 당신에게 천하를 안겨드릴 테니."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사내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사내는 더 이상 이성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거칠고 투박한 두 팔이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두 팔이 사내의 목을 휘감으며 뜨거운 입술이 맞부딪혔다.

촛불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장 위에서 하나로 얽혔다. 짐꾼으로 살며 굳은살이 박인 사내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붉은 치맛자락을 조심스레 끌어내렸다. 비단 스치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눈부신 나신에 사내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사내의 해진 베적삼을 벗겨내고, 단단하게 뭉친 그의 어깨와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아…."

방 안에는 낮고 달콤한 신음과 거친 숨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억눌려왔던 사내의 욕망이 불을 뿜듯 타올랐고, 무녀로서의 메마른 삶에 지쳐 있던 그녀 역시 사내의 뜨거운 품속에서 진정한 여인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살결과 살결이 맞닿고, 체온이 섞이며 두 사람은 서로의 영혼까지 깊숙이 탐닉했다. 달빛조차 구름 뒤로 숨은 깊은 밤, 쾌락의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고, 그 짙은 땀방울 속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로 단단하게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새벽녘, 기분 좋은 피로감에 안겨 누워있는 사내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일 날이 밝거든, 당장 이 돈주머니를 들고 칠패 시장으로 가세요."

그녀가 머리맡에 둔 묵직한 비단 주머니를 사내의 품에 안겨주었다. 사내가 놀란 눈으로 주머니를 열자, 번쩍이는 은정(銀錠)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우리의 시작입니다. 시장에 가거든 내일 정오 무렵에 평안도에서 내려온 상단이 도착할 것입니다. 그들이 가져온 비단 중, 물에 젖어 곰팡이가 핀 비단들이 있을 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것들을 헐값에 모두 사들이세요."

"예? 멀쩡한 비단도 아니고 곰팡이 핀 비단을 어찌 돈을 주고 산단 말입니까?"

사내가 의아한 듯 묻자, 그녀가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가슴팍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를 안았을 때의 그 담대함은 어디 갔습니까? 그저 나를 믿고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눈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 3: 신기(神氣)가 이끄는 부의 길, 거상의 첫걸음

다음 날 정오, 칠패 시장. 사내는 품속에 은정 주머니를 꽉 쥔 채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평안도에서 내려온 대규모 상단이 시장 어귀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상단의 행수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장마철 궂은 날씨에 며칠을 오다 보니, 마차에 싣고 온 최고급 명주 비단 중 절반 가까이가 빗물에 젖어 시퍼렇게 곰팡이가 피어버린 것이다.

"아이고, 이를 어쩐다! 이 귀한 명주가 똥값이 되어버렸으니, 대행수 어른께 경을 치겠구나!"

상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는 가운데, 사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 이보시오들. 그 젖은 비단들, 헐값에 넘기시겠소? 내가 다 사겠소만."

행수들은 미친놈을 보듯 사내를 훑어보았다. 남루한 베적삼 차림의 사내가 어찌 비단을 산단 말인가. 하지만 사내가 품에서 묵직한 은정들을 꺼내어 보이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국, 사내는 상단이 버리다시피 던져준 곰팡이 핀 비단 수백 필을 원래 가격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헐값에 모조리 사들였다. 구루마에 비단을 싣고 돌아오는 길 내내, 사내는 자신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귀신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지. 이 썩은 비단 쪼가리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하지만 사내가 기와집 마당에 비단을 내려놓자마자, 그녀는 하인들을 시켜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끓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은밀히 구해온 정체불명의 푸른빛 가루를 끓는 물에 잔뜩 풀어 넣었다.

"자, 이제 이 비단들을 솥에 넣고 푹 삶아내세요. 그리고 볕이 잘 드는 곳에 널어 말리십시오."

사내는 영문도 모른 채 하인들과 함께 하루 꼬박 비단을 삶고 널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사내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곰팡이가 피어 흉측했던 비단들은 온데간데없고, 푸른빛 약초 물이 고르게 배어들어 마치 가을 하늘처럼 맑고 영롱한 쪽빛 비단으로 재탄생해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염색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깊고 신비로운 색감이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서역에서 건너온 특별한 염료입니다. 곰팡이가 핀 섬유에만 반응하여 더욱 짙게 색을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지요. 이제 이것을 들고 운종가 최고 포목점으로 가세요."

그녀의 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마침 궁중에서 열리는 큰 연회를 앞두고 특별한 색감의 비단을 찾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한양의 대형 포목점들은, 사내가 가져온 신비로운 쪽빛 비단을 보자마자 환장을 하며 달려들었다. 서로 웃돈을 주겠다며 경합이 벌어졌고, 결국 사내는 비단을 샀던 가격의 무려 삼십 배에 달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처음으로 만져보는 어마어마한 돈다발 앞에서 사내는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기이한 신기, 미래를 내다보고 흐름을 짚어내는 그 통찰력이 소름 끼치도록 경이로웠다. 흥분한 얼굴로 달려온 사내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당신 말이 맞았소! 내가… 내가 돈을 벌었소! 당신은 진정 하늘이 내게 내려준 선녀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사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첫 번째 성공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의 꿰뚫어 보는 눈과, 점차 눈을 뜨기 시작한 사내 특유의 배포와 상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다음 달에는 소금이 귀해질 것입니다. 영남 지방의 소금을 미리 매점매석하십시오."
"기름값이 오를 조짐이 보입니다. 황해도의 참깨를 모조리 사들이세요."

그녀가 길을 제시하면, 사내는 망설임 없이 밀어붙였다. 놀랍게도 사내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그녀가 판을 깔아주면, 사내는 특유의 서글서글한 친화력과 뱃심으로 상인들의 마음을 얻고 거래망을 넓혀갔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내의 눈빛에서는 과거의 비굴한 짐꾼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좌중을 압도하는 거상의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모은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조그만 기와집은 한양 도성에서 제일가는 으리으리한 아흔아홉 칸짜리 대저택으로 바뀌었고, 장터 바닥을 구르던 짐꾼 총각은 조선 팔도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대행수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느 늦은 밤, 금은보화가 가득 쌓인 창고를 둘러보던 사내가 뒤따라온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꽉 잡아끌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그의 태도에는 이제 여유로움과 짙은 남성미가 배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당신 덕이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장터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짐을 지고 있었겠지."

"아닙니다. 내가 씨앗을 주었으나, 그것을 이렇게 거대한 나무로 키워낸 것은 당신의 그릇이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사내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자신의 넓은 품으로 깊이 끌어당겼다.

"재물도 좋고 권세도 좋지만… 내게 이 세상 가장 귀한 보물은 오직 당신 하나뿐이오. 내 평생 당신만을 연모하며,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오."

뜨거운 고백과 함께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한번 탐욕스럽게 포개졌다. 부와 명예를 모두 손에 쥔 사내의 거침없는 손길에, 그녀는 달콤한 숨결을 내뱉으며 기꺼이 그의 품속으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 4: 백만장자가 된 사내, 깊어지는 은밀한 사랑

한양 도성 마포 나루터. 거대한 돛을 단 수십 척의 상선들이 줄지어 정박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배에서 내리는 물화들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최고급 비단부터 시작해, 왜관을 거쳐 올라온 은괴와 진귀한 향료들까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수백 명의 짐꾼들이 등짐을 지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 거대한 활기의 중심에는, 십수 년 전 자신 역시 저들처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장터 바닥을 구르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최고급 호박 단추가 달린 비단 두루마기를 걸치고, 윤기가 흐르는 갓을 쓴 그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남루했던 흔적을 단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내의 눈빛은 한 마리 호랑이처럼 매섭게 번뜩이며 상단의 흐름을 단숨에 꿰뚫어 보았고, 그의 손짓 한 번에 조선 팔도의 물가가 요동을 쳤다. 이제 그는 명실공히 조선 제일의 거상이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문세가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부력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대행수 어른, 이번 청나라와의 인삼 교역으로 얻은 이문이 지난번의 세 배를 훌쩍 넘겼습니다. 창고에 은정을 쌓을 공간이 부족할 지경입니다요."

상단의 도기장이가 굽신거리며 장부를 내밀었으나, 사내는 그 두꺼운 장부를 힐끗 쳐다볼 뿐 이내 시선을 돌려 한양 도성 쪽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천하의 재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기방의 명기들이 앞다투어 그의 수청을 들고자 줄을 섰건만, 사내의 머릿속은 오직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저 멀리 도성 한복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솟을대문 너머 아흔아홉 칸의 웅장한 대저택. 그 깊고 고요한 안채에서 밤낮으로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단 한 사람,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은 신비롭고도 눈부신 여인 연화. 그녀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만이 사내의 가슴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다.

"수고들 하였다. 남은 정리는 네놈들이 알아서 철저히 하도록 해라. 나는 이만 본가로 돌아갈 터이니."

사내는 호위 무사들이 대령한 가마에 오르는 것조차 답답하다며, 늠름한 흑마의 안장에 훌쩍 올라타 도성을 향해 말채찍을 휘둘렀다. 말발굽 소리가 어스름이 내리는 한양 거리를 요란하게 울렸다.

대저택의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수십 명의 하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주인의 귀환을 맞이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뜰에는 각지에서 진상 올라온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나, 사내의 발걸음은 그 어떤 풍경에도 머물지 않고 곧장 안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섬돌 위에 신발을 벗어 던지다시피 하고 굳게 닫힌 방문을 조심스레 열자, 방 안을 가득 채운 은은하고도 매혹적인 난초 향이 사내의 코끝을 훅 치고 들어왔다.

방 안은 호화로운 겉모습과는 달리 정갈하고 기품이 넘쳤다. 최고급 명주로 지은 옥색 치마저고리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가, 호롱불 아래서 고요히 자수를 놓고 있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속을 알 수 없던 무녀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그녀의 뺨은 오랜만에 지아비를 마주한 여인의 설렘으로 복숭아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이리 늦은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어찌 깨어 있소. 옥체 상할라, 불빛도 어두운데 침소에 들지 않고."

사내의 낮고 굵은,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에 그녀가 서둘러 자수 틀을 내려놓고 사뿐히 다가왔다.

"돌아오실 날짜만 꼽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험한 뱃길에 수만 리 타국까지, 무고히 다녀오셨는지요. 혹여 옥체에 상한 곳은 없으신지요."

사내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작은 몸을 단숨에 자신의 넓은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익숙하고도 짙은, 사내 특유의 거친 땀 냄새와 바깥바람의 체취가 훅 끼쳐오자, 그녀는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그의 단단한 목에 두 팔을 감아왔다.

"수만 리 밖 타국에 나가 수만 냥의 은덩이를 만지면서도, 내 머릿속엔 온통 당신을 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소. 행여나 당신이 내린 이 기적 같은 삶이 아침이면 깨어버릴 덧없는 한여름 밤의 꿈일까, 나는 매일 밤이 두려웠단 말이오. 내 두 눈으로 당신을 담고, 내 두 팔로 당신을 이렇게 안고 있어야만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단 말이오."

"당신이 흘린 피땀으로 쌓아 올린 그 거대한 성채가 어찌 꿈이겠습니까. 당신은 이제 진흙 속을 뒹굴던 이무기가 아니라, 하늘의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거대한 용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 용의 등에 올라탄 운 좋은 아녀자일 뿐이지요."

그녀의 다정하고도 현명한 위로에 사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방 안을 밝히던 촛불이 사내의 거친 움직임에 파르르 떨리다 이내 꺼져버렸고, 얇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푸르스름한 달빛만이 두 사람의 얽힌 실루엣을 비추기 시작했다. 최고급 비단 금침이 깔린 잠자리 위에 그녀를 조심스레 눕힌 사내의 눈동자에는, 천하를 호령하는 거상의 냉철함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한 여인을 향한 지독한 갈망과 소유욕만이 짙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내의 크고 투박한 손이 그녀의 저고리 고름을 단숨에 풀어 내렸다. 스르륵, 비단이 흘러내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눈부시게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사내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가녀린 목선부터 시작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쇄골을 타고 내려가며, 닿는 곳마다 붉은 꽃잎이 피어나듯 선명하고 농염한 자국을 새겨 넣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적막을 깨고,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달콤하고도 속절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과거 사람들의 탁한 운명을 읽어내며 차갑게 굳어있던 무녀의 몸은, 오직 이 사내의 뜨거운 열기 앞에서만 완벽하게 무장 해제되어 눈 녹듯 허물어졌다. 그녀의 섬세하고 하얀 손가락이 사내의 단단하게 뭉친 어깨와 넓은 등을 타고 오르며 그의 거친 숨결에 화답했다. 살결과 살결이 맞닿고 마찰할 때마다 찌릿한 전율이 두 사람의 척추를 타고 뻗어 나갔다.

달빛조차 구름 뒤로 몸을 숨긴 깊은 밤. 두 사람의 몸짓은 거친 파도처럼 격렬해졌다가도 이내 잔잔한 호수처럼 한없이 부드러워지기를 반복했다. 육체의 원초적인 쾌락을 넘어, 서로의 영혼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핥아 내리는 듯한 지독한 교감이었다. 사내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거대한 충만함 속에서 그녀의 가장 깊은 곳을 끝없이 탐닉했고, 그녀는 기꺼이 쾌락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사내의 거대한 존재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땀방울이 맺힌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고, 거친 숨소리가 하나의 박자로 완벽하게 포개어지며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폭풍 같았던 길고 긴 정사가 끝난 후. 은은한 달빛 아래, 기분 좋은 나른함에 젖은 채 사내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안긴 그녀는 사내의 심장 고동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세상 그 어떤 금은보화 부딪히는 소리보다 든든하고 평온한 소리였다. 사내 역시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충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완벽해 보이는 행복의 이면, 두 사람의 귓가를 스치는 서늘한 밤바람 속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작은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토록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가지. 이 넓은 집안 어디에서도 핏덩이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잔인한 적막감이었다. 사내의 숨결이 닿은 그녀의 눈가에, 아무도 모르게 물기가 서서히 맺히기 시작했다.

씬 5. 삼신할미의 외면, 서로를 품어내는 밤

옷깃을 파고드는 스산한 늦가을의 칼바람이 창호지를 요란하게 때리던 밤. 사내가 깊은 피로에 지쳐 곯아떨어진 사이, 그녀는 가만히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한기가 도는 마루를 맨발로 디딘 그녀는 얇은 소복 하나만을 걸친 채, 아무도 찾지 않는 뒤뜰 깊숙한 곳에 덤불로 숨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별채로 향했다. 그곳은 그녀가 무녀로서의 삶을 버리고 사내의 아내가 된 이후,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그녀만의 낡은 신당(神堂)이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제단. 한때 한양 도성을 쥐락펴락하던 신통한 무녀의 제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낡은 촛대에 불을 밝히고, 차가운 우물물로 정화수를 떠다 올렸다. 바싹 마른 향로에 불을 붙이자, 매캐하고 짙은 향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피어올랐다.

오랫동안 굳게 닫아두었던 영안(靈眼)을 억지로 열어젖히자, 억눌려왔던 거대한 신기(神氣)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경련을 일으켰고,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옥죄어 왔다. 그녀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방울 대신 자신의 피가 맺힌 손가락으로 쌀알을 한 줌 쥐어 제단 위에 거칠게 흩뿌렸다.

'하늘의 신령님, 지엄하신 삼신할미시여… 제발 비옵나이다. 이 미천한 제게 부귀영화는 이미 차고 넘치도록 주셨으니, 이 재물을 모두 거두어 가셔도 좋습니다. 부디… 부디 저희 두 사람의 피를 이은 작은 생명 하나만, 서방님을 꼭 빼닮은 아기 하나만 허락해 주시옵소서. 제 평생의 죄업은 이 목숨을 바쳐 씻겠나이다.'

피를 토하는 듯한 절절하고 간절한 기도였다. 소복이 차가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혼신을 다해 하늘의 뜻을 구했다. 그러나 흩뿌려진 쌀알의 궤적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눈동자가 이내 공포와 절망으로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뇌리를 강타한 점괘와, 귓가를 찢을 듯 울려 퍼지는 신령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고도 잔인했다.

'네 이년! 감히 천기(天氣)를 누설하여 인간의 정해진 운명을 비틀어 놓은 대가를 잊었느냐! 진흙 속에서 썩어야 할 사내의 명줄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하늘의 재물을 마음대로 탐하게 한 죄. 하늘은 너희에게 천하의 모든 재물을 허락하였으나, 생명을 점지하는 삼신할미는 너희 부부의 태(胎)를 영원히 닫아버렸느니라! 너희의 핏줄은 말라붙었으니, 죽는 그날까지 혈육의 연은 결코 맺어질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아아악!"

짐승의 울음 같은 비통한 비명이 신당 안을 갈랐다. 절대적인 절망의 점괘 앞에서 그녀는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하고 말았다. 애초에 하늘의 순리를 거스르고 사내의 운명을 바꾸겠다고 오만을 부린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지은 그 오만한 죗값으로 인해, 저렇게 하늘처럼 크고 넓은, 천하를 다 가진 완벽한 사내가 평생 자신의 핏줄 하나 안아보지 못하고 대가 끊기게 생겼다. 그 잔혹한 죄책감이 가슴을 수천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소복의 앞춉이 뜨거운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들어가고,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짐승처럼 울부짖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굳게 닫혀 있던 신당의 문이 거칠게 벌컥 열렸다.

"당신! 여기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게요!"

잠에서 깨어 서늘해진 옆자리를 더듬다 사색이 되어 그녀를 찾아 헤매던 사내였다. 차가운 흙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며 통곡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사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숨에 달려온 사내는 자신이 입고 있던 두툼한 비단 두루마기를 벗어 그녀의 얇고 가녀린 어깨 위로 단단히 덮어주었다.

"어찌… 어찌 내게 무녀의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 약조해 놓고, 이런 흉측한 곳에서 이리 떨고 있는 것이오! 대체 무슨 일로 이리 서럽게 우는 것이냔 말이오!"

"흐흑… 서방님, 흑…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를 당장 내치시고 용서하지 마십시오. 다 저 때문입니다. 이 미천한 년이 감히 서방님의 운명을 억지로 비틀어 하늘의 순리를 어긴 탓에, 하늘이 크게 노하시어 우리에게 평생 자식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합니다. 삼신할미께서… 우리 부부의 태를 말려버려, 평생 핏줄을 안아볼 수 없다 합니다…."

그녀의 울음 섞인 참혹한 고백에 사내의 거칠던 숨결이 일순간 멎었다. 천하를 다 가진 사내였지만, 그 역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내심 자신을 닮은 든든한 아들과 그녀를 닮은 어여쁜 딸을 안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왜 없었겠는가. 넓은 저택을 거닐 때마다 텅 빈 마당을 보며 남몰래 한숨을 삼키던 사내였다.

사내는 굳은 듯 한참을 깊은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녀는 지아비의 그 침묵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분노와 원망이라 여겨 더욱 서럽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이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녀의 창백한 뺨을 감싸 쥐는 것은, 분노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두 손이었다.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소. 그깟 핏줄, 그깟 자식이 대체 무엇이 대수라고 나를 두고 이리 처량하게 우는 것이오."

"서방님… 그게 무슨…."

"나는 본디 장터 바닥을 뒹굴며 오늘 밥 한술을 구걸하고, 내일은 얼어 죽을지 몰라 목숨을 부지하던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소. 그런 벌레 같은 내게 사람의 삶을 찾아주고, 거상이라는 이름을 달아주며, 이 거대한 천하를 내 품에 안겨준 것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오. 내 인생의 전부이자, 내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가 오직 당신인데, 당신 외에 다른 무엇을 내가 더 바란단 말이오!"

사내의 목소리는 단 한 치의 흔들림이나 거짓도 없이, 태산처럼 단단하고 바다처럼 깊었다. 그는 신당 제단 위에 놓인 정화수와 쌀알들을 거칠게 발로 차 엎어버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진 사기그릇 파편 위로 사내는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하늘이 자식을 주지 않겠다면, 영원히 주지 말라지! 나는 내 곁에 오직 당신 하나만 있으면 그 어떤 천벌을 내려도 두렵지 않소. 당신이 없는 부귀영화도, 당신이 낳아주지 않은 자식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소. 그러니 제발… 다시는 나를 두고 이런 서늘한 곳에서 혼자 죄인처럼 눈물짓지 마시오. 당신이 울면 내 심장이 찢어진단 말이오."

사내는 눈물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차가운 신당의 기운을 뒤로하고, 사내는 굳건한 걸음으로 따뜻한 안채의 침소를 향해 걸어갔다.

침상에 그녀를 눕힌 사내는 그녀의 젖은 뺨과 떨리는 입술에 끊임없이, 아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뼛속까지 스며든 불안과 죄책감을 지워내려 했다. 밤새도록 이어진 사내의 품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절절했다. 쾌락을 좇는 정사가 아니라, 자신의 온몸과 영혼을 바쳐 '오직 당신뿐'이라는 굳은 맹세를 그녀의 피부 깊숙이 새겨 넣는 거룩한 의식과도 같았다.

그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지고 뜨겁게 안으며, 자식이 없다는 서글픔과 절망마저도 서로를 향한 광기 어릴 만큼 깊은 연모의 불꽃으로 모두 태워버렸다. 그날 밤, 삼신할미의 잔인한 저주 앞에서도 두 사람은 핏줄이라는 세속의 굴레를 완벽하게 초월하여,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하나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씬 6. 피보다 진한 정, 천하를 품은 대가족 (해피엔딩)

그 거센 눈물의 밤으로부터 또다시 십여 년의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한양 도성은 물론이고 의주부터 동래까지, 조선 팔도 어디를 가도 두 사람의 상단 깃발이 펄럭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부가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갔지만, 두 사람은 그 막대한 재물을 그저 곳간에서 썩혀두며 자신들의 배만 불리지 않았다. 삼신할미가 그들에게 혈육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늘의 뜻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역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따사로운 봄볕이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을 비추는 대저택의 너른 앞마당. 한때 두 사람의 깊은 한숨과 적막만이 감돌았던 아흔아홉 칸짜리 거대한 기와집은, 이제 수십 명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노는 까르르 웃음소리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아버님! 어머님! 이것 좀 보십시오! 제가 오늘 서당에서 동몽선습을 다 떼고 훈장님께 제일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에이, 형님은 글만 읽을 줄 알지 셈은 깡통이잖습니까! 아버님, 저는 오늘 객주에서 주판을 튕겨 이문의 오차를 단번에 잡아냈습니다. 제가 나중에 아버님 상단의 대행수 자리를 물려받을 것입니다!"

"어머님~ 이것 보세요! 제가 뒷산에서 꺾어온 진달래꽃이에요. 어머님 머리에 꽂아드릴게요!"

저마다 까치동정을 단 형형색색의 고운 비단옷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사내와 그녀의 무릎 언저리로 파고들었다. 몇 해 전 닥친 지독한 흉년과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고 길거리를 헤매던 고아들, 빚더미에 앉아 청나라로 팔려 갈 위기에 처했던 아이들, 그리고 버려진 핏덩이들. 사내와 그녀는 막대한 재물을 풀어 조선 팔도를 누비며 이 불쌍한 아이들을 모조리 거두어들였고, 기꺼이 자신들의 호적에 친자식으로 당당하게 올렸다. 그 수가 해마다 늘어나 어느덧 쉰 명이 넘는, 조선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대가족을 이루게 된 것이다.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자랑하는 맏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 안긴 막내딸의 볼에 입을 맞추는 사내의 눈가에는 어느덧 세월을 말해주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번진 인자하고 넉넉한 미소는 마치 세상을 다 품은 부처와도 같이 평온했다.

"오냐, 오냐. 다들 참으로 기특하고 장하구나. 헌데 이놈들아, 글공부로 정승 판서가 되는 것도 좋고 장사로 천하의 거상이 되는 것도 좋지만, 내 늘 무엇이라 가르쳤느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배곯고 어려운 이를 지나치지 않고 돕는 따뜻한 마음이라 하지 않았느냐. 알겠느냐?"

"예! 아버님 가르침, 가슴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아이들이 힘차게 대답하고는 다시 나비 떼처럼 마당으로 우르르 뛰어나가자, 곁에서 아이들을 먹일 달콤한 다과상을 챙기던 그녀가 사내의 듬직한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 왔다. 세월의 풍파를 거치며 칠흑 같던 머릿결에는 어느새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그녀 특유의 맑고 기품 있는 미모와 깊은 눈빛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우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보. 당신의 그 사람 보는 눈은 늙지도 않는구려. 참으로 신통방통하지. 이 수많은 아이들 중 어찌 하나같이 이리도 심성이 곱고 총명한 녀석들만 데려왔소. 전생에 우리 부부가 나라라도 구했나 보오."

사내의 농담 섞인 호탕한 웃음에 그녀가 고운 눈웃음을 치며 사내의 크고 투박한 손을 깍지 껴 단단히 마주 잡았다.

"제 관상 보는 눈, 기운을 읽는 눈이 언제 틀린 적이 있던가요? 처음 그 먼지 날리는 장터 바닥에서 짐통을 메고 있던 당신을 단번에 알아보았을 때부터, 제 눈은 세상의 흙 속에 진주처럼 숨겨진 가장 귀한 보석들을 찾아내는 데 이골이 났으니까요. 이 아이들 모두가 우리에겐 하늘이 내린 보석들입니다."

"허허, 듣고 보니 그 말이 백번 지당하오. 당신의 그 신기 어린 눈이 아니었으면, 나 역시 이 녀석들처럼 어느 차가운 길바닥에서 진작에 굶어 죽어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오. 내 평생 당신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는단 말이오."

사내가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마당 저편에서는 장성한 첫째와 둘째가 상단의 호위 무사들에게 목검으로 호신술을 배우며 기합을 넣고 있었고, 어린 딸아이들은 꽃밭을 누비며 숨바꼭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록 두 사람의 몸을 빌려 낳은, 피가 섞인 친자식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 어떤 천륜의 핏줄보다 더 끈끈하고 맹렬한 사랑과 정이 온 저택을 가득 채워 터질 듯 팽팽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늘이 우리에게 우리의 핏줄을 주지 않으신 것은, 결코 잔인한 형벌이 아니었군요. 가난하고 헐벗은 채 세상에 버려진 이 수많은 아이들의 품이 되어주라고… 우리가 부당하게 앞당겨 받은 이 넘치는 부귀영화를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아낌없이 나누어주라는, 삼신할미의 참으로 깊고도 자비로운 안배였음을… 이제야 완벽히 알겠습니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눈부신 평화 속에서, 속으로 가만히 하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무녀로서 타인의 탁한 운명을 비웃고 염세적인 회의감에 빠져 차갑게 죽어갔던 과거는, 이제 전생의 일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운명은 하늘이 정해진 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강인한 의지와 사랑으로 개척하고 넓혀가는 것임을. 두 사람은 그들의 치열했던 삶을 통해 완벽하게 증명해 낸 것이다.

"여보, 날이 참으로 화창하오. 우리 오랜만에 운종가 저잣거리에 구경이나 좀 나갑시다. 봄이 오니 녀석들이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커서, 당장 입힐 명주 꼬까옷이라도 넉넉히 더 지어와야겠소."

"예, 서방님. 가시는 길에 그 옛날 칠패 시장 어귀에서 드시던, 그 탁하고 뜨끈한 국밥도 한 그릇 사주십시오. 최고급 산해진미보다 저는 그 저잣거리 국밥이 가끔 그리 그립습니다."

"하하하! 좋지! 조선 제일의 으뜸가는 거상이 오늘 마누라를 위해 국밥 한 턱을 거하게 쏠 터이니, 기대 단단히 하시오!"

금빛으로 부서지는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부부의 주름진 손등과 다정하게 맞잡은 두 손 위로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신기로 맺어진 기묘한 인연에서 시작되어 끝없는 탐욕과 시련을 이겨낸 두 사람의 위대한 사랑은, 수많은 버려진 아이들의 든든하고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며 조선 땅에서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해피엔딩의 꽃을 활짝 피워내고 있었다.

▶ 유튜브 엔딩멘트
관상으로 시작된 기묘한 인연이 조선 제일의 거상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수많은 고아들의 따뜻한 부모가 되는 아름다운 기적을 이뤄냈네요. 삼신할미의 외면마저도 더 큰 사랑으로 품어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에 따뜻한 위로가 되었길 바랍니다. 오늘 이야기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리며, 다음에도 더 흥미진진하고 가슴 따뜻한 조선시대 로맨스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