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뒷골목, 사창가의 실체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인 기생 제도 외에도 비공식 성매매가 성행했다 『한경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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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조선시대라고 하면 유교의 나라, 예절의 나라를 떠올린다. 남녀칠세부동석, 여자는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해가 지고 한양에 어둠이 내리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열렸다. 종로 뒷골목에는 은밀한 등불이 켜졌고, 청계천 건너 남촌 골목에서는 비단 치마 스치는 소리가 밤바람에 섞여 들렸다. 공식 기적에 올라 있는 관기만 조선의 밤을 채운 게 아니었다. 양반의 첩, 과부, 몰락한 양반가의 딸,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여인들이 어둠 속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한경지략에는 이런 한양의 이면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늘 이 이야기를 들으면, 조선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 그리고 그 위선 아래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 해가 지면 열리는 세상
조선의 수도 한양.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한양은 유교의 모범 도시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경전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고, 관리들은 관복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궁궐로 향했다. 양반 부인들은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외출했으며, 남녀가 길에서 마주치면 여자 쪽이 담 쪽으로 비켜서는 것이 예의였다. 누가 보아도 예의 바르고, 질서 잡히고, 도덕적인 나라. 그것이 낮의 한양이었다.
그런데 인정 종소리가 울리고 해가 넘어가면 한양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먼저 통행금지가 시작되었다. 밤 열 시에 인정이 스물여덟 번 울리면 사대문이 닫히고, 큰길에는 순라군이 돌았다. 원칙대로라면 아무도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규칙은 깨지라고 있는 법이었다. 아니, 조선의 밤 규칙은 아예 처음부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통행금지가 시작되면 큰길은 비었지만, 골목은 오히려 붐볐다. 종로 뒷골목, 청계천 다리 아래, 남산 기슭의 좁은 길, 서소문 밖 장터 근처. 이런 곳에 작은 등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등불 아래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갓을 눌러 쓴 양반, 두루마기 깃을 세워 얼굴을 가린 관리, 장사꾼 차림의 중인. 낮에는 절대 이런 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사람들이 밤이면 골목을 누볐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다양했다. 주막에서 술 한잔 걸치는 정도는 양반가였다. 좀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색주가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색주가는 겉으로는 술집이었다. 간판도 없고, 문패도 없었다. 그냥 낡은 초가집 문 앞에 붉은 등 하나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양 사내라면 그 붉은 등이 무슨 뜻인지 다 알았다. 술만 파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한경지략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한양 남촌과 북촌의 골목마다 사사로이 술과 색을 파는 집이 있으니, 밤이면 남정네들이 담을 타 넘어 드나든다." 담을 타 넘는다. 이 표현이 핵심이다. 대문으로 떳떳하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담을 넘는다는 것은, 모두가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는 뜻이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지만, 유교의 도덕은 낮에만 작동했다. 해가 지면 도덕도 함께 잠들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진짜 욕망이 깨어났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어둠 속 세상에 대한 것이다. 불편할 수도 있고,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조선의 진짜 얼굴이었다. 역사는 빛나는 면만 보여주지 않는다. 어두운 골목까지 들여다봐야 비로소 온전한 그림이 된다.
※ 관기와 사기, 그 사이 어딘가
조선의 기생 제도를 먼저 이해해야 뒷골목의 실체가 보인다. 조선에는 공식적으로 기생이 존재했다. 이들을 관기라고 불렀다. 관기는 나라에 소속된 여인들이었다. 기적이라는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었고, 관아에서 관리했다. 이들의 공식 업무는 연회에서 노래와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양반들의 잔치에 불려가 가야금을 타고, 시를 읊고, 술을 따랐다. 겉으로는 예술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관기의 공식 업무가 가무였다 해도, 연회가 깊어지고 술이 돌면 그 너머의 일이 벌어지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양반이 기생의 손목을 잡고 별채로 들어가는 것을 아무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연회 문화의 일부로 여겨졌다. 기생은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관청 소속의 천민이었으니까. 이것이 조선 기생 제도의 첫 번째 위선이었다. 예술이라는 포장지 아래에 착취가 숨어 있었다.
그런데 관기만으로는 한양의 밤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관기는 수가 제한되어 있었고, 아무나 부를 수 없었다. 고위 관리나 유력 양반이 아니면 관기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면 중하급 양반, 상인, 군인, 장사꾼 같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로 사기에게 갔다.
사기. 한자로 쓰면 私妓, 사사로운 기생이라는 뜻이다. 기적에 이름이 없는, 비공식 기생이었다. 이들은 관청에 소속되지 않은 채 스스로 몸을 팔거나, 주인이 있는 경우 주인의 지시로 손님을 받았다. 사기의 출신은 다양했다. 기적에서 빠진 전직 관기, 남편이 죽은 과부, 집안이 몰락한 양반가의 딸, 빚에 팔려온 여인, 고향을 떠나 한양으로 흘러든 유랑민 여성까지. 이유는 달랐지만 도착한 곳은 같았다. 한양 뒷골목이었다.
사기는 관기처럼 가야금을 타거나 시를 읊지 않았다.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단순했다. 색주가에 앉아 손님에게 술을 따르고, 손님이 원하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예술이라는 포장지조차 없었다. 날것 그대로의 거래였다.
한경지략은 이렇게 적고 있다. "사창의 여인은 기적에 오르지 않으나, 그 수가 관기의 열 배에 달한다." 관기보다 열 배가 많았다. 이것이 조선 밤문화의 진짜 규모였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화려한 기생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수면 아래에는 이름도 없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수천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조선은 이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없앨 수도 없었다. 수요가 있는 한 공급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유교의 나라 조선은 이 모순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간단했다. 모른 척했다.
※ 종로 뒷골목의 색주가
자, 이제 실제로 색주가 안으로 들어가 보자. 종로 네거리에서 골목 하나를 꺾어 들어가면 좁은 길이 나온다. 낮에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골목이다. 빨래가 널려 있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그런 골목. 하지만 밤이 되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골목 입구에 등불이 켜지고, 안쪽에서 술내음과 함께 은근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색주가의 외관은 보잘것없었다. 초가지붕에 방 서넛, 마당에 작은 부엌 하나. 겉에서 보면 그냥 가난한 집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달랐다. 방마다 자리가 깔려 있고, 한쪽에 술상이 놓여 있었다. 등잔 불빛이 은은하게 방 안을 비추었고, 벽에는 싸구려 병풍이 쳐져 있었다.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어둠과 술이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주모가 맞았다. 주모는 색주가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대부분 나이 든 여인으로, 젊은 시절 자신도 이 일을 했던 경우가 많았다. 주모가 손님을 자리에 앉히고 술을 내왔다. 탁주 한 사발에 마른 안주 몇 가지. 술 한잔이 돌면 주모가 슬쩍 물었다. "나으리, 심심하시면 말동무를 붙여드릴까요?" 손님이 고개를 끄덕이면 안쪽 방에서 여인이 나왔다.
여인은 열여덟에서 스물대여섯 사이가 대부분이었다. 저고리는 깨끗했지만 비단은 아니었고, 머리는 단정하게 올렸지만 비녀는 싸구려였다. 관기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어둠 속 등잔 불빛 아래에서는 누구나 아름다워 보였다. 여인이 손님 옆에 앉아 술을 따랐다. 손가락이 술잔에 스칠 듯 말 듯 하는 것이 기술이었다. 너무 드러내면 천박하고, 너무 숨기면 재미가 없었다. 그 미묘한 경계를 아는 여인이 인기가 많았다.
술이 몇 순배 돌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손님은 대부분 낮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관직에서 받은 스트레스, 아내에 대한 불만, 사업의 어려움.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나으리,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 한마디가 돈이 되었다. 남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에게 약했다. 집에서 아내가 해주지 않는 것, 친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이곳에서 털어놓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손님이 주모에게 눈짓을 했다. 주모는 안쪽 방 문을 열어주었다. 안쪽 방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술값이 아니라 다른 값이 붙었다. 조선시대 야담집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밤이 깊으면 등잔도 부끄러워 꺼진다." 등잔이 꺼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색주가의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손님은 돈을 놓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절대 앞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들어올 때도 골목으로, 나갈 때도 골목으로.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양의 밤은 그런 공공연한 비밀들로 채워져 있었다.
※ 양반들의 이중생활
조선 양반의 하루를 따라가 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관복을 입고 성리학 경전을 읽었다. 공자 왈, 맹자 왈, 인의예지. 도덕과 절제를 입에 달고 살았다. 관청에 출근하면 아랫사람에게 예법을 가르치고, 백성의 풍속이 타락했다며 상소를 올렸다. "남녀의 구별을 엄히 하고, 음란한 풍속을 바로잡아야 하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관리들도 열에 넷다섯은 밤에 어디를 가는지 서로 알고 있었다.
해가 지면 변신이 시작되었다. 관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갓을 깊이 눌러 쓰고 두루마기 깃을 세웠다. 하인에게는 "서재에서 책을 읽을 테니 찾지 마라" 하고 일렀다. 그리고 뒷담을 넘었다. 양반이 자기 집 담을 넘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조선 야담집에는 이런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체면이 목숨인 양반들이 밤이면 담을 넘고 골목을 누비고 색주가의 문을 두드렸다.
야담집 기문총화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양의 어느 고위 관리가 종로 뒷골목 색주가에 단골이었다. 매번 갓을 깊이 눌러쓰고 왔지만, 색주가 주모는 진작에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 관리가 하루는 색주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방 손님과 마주쳤다. 양쪽 다 갓을 눌러쓰고 있었는데,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로 알아보았다. 같은 관청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동료였던 것이다. 둘 다 얼굴이 하얘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한쪽이 먼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네도 왔는가." 다른 쪽이 대답했다. "자네도 왔구먼." 그 뒤로 둘은 다시는 그날 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관청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했다. 서로의 비밀을 쥐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끈끈한 유대가 되었다. 야담집은 이 대목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낮의 도학군자가 밤의 색한이 되니, 갓 아래 두 얼굴을 가진 자가 한양에 천인은 되리라."
양반들이 색주가에서 가장 무서워한 것은 포도청이 아니었다. 아내였다. 조선 양반가의 부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편이 밤에 어디를 다니는지 감을 잡으면 하인을 시켜 미행하게 했다. 들통나면 집안이 뒤집어졌다. 시어머니에게 고하고, 문중 어른을 불러 꾸짖게 했다. 양반의 체면이 깎이는 건 관직을 잃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양반들은 색주가 출입에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내들도 모르는 척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 양반가 부인의 덕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깥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부덕이다"라는 논리였다. 남편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집안이 조용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의 이중 잣대였다. 남자의 외도는 "풍류"라고 포장되었고, 여자의 외도는 "간통"으로 처벌받았다. 같은 행위인데 성별에 따라 이름이 달라졌다. 양반 남자가 색주가에 가면 풍류를 아는 멋쟁이였고, 양반 여자가 바깥 남자를 만나면 칠거지악으로 쫓겨났다. 조선의 밤은 이런 불평등 위에 서 있었다.
※ 돈과 몸, 은밀한 거래의 경제학
색주가에도 등급이 있었다. 아무 곳이나 같은 값을 받는 게 아니었다. 조선의 비공식 성매매 시장은 나름대로 치밀한 경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 호텔에 별 등급이 있듯이, 한양 뒷골목의 색주가에도 암묵적인 등급 체계가 존재했다.
최상급은 양반가 근처의 은밀한 사저형 색주가였다. 겉으로 보면 양반집과 구분이 안 되었다. 담이 높고 대문이 단단했으며, 안에 들어가면 마루가 깨끗하고 병풍이 고급이었다. 방 안에는 비단 이불이 깔려 있었고, 술상에는 약주와 안주가 격식 있게 차려졌다. 이런 곳의 여인들은 전직 관기 출신이 많았다. 가야금도 칠 줄 알고, 시도 읊을 줄 알고, 대화 수준도 높았다. 양반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는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손님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서화를 펼쳐 놓고 시 한 수를 짓기도 했다.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풍류를 파는 것처럼 포장되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결국 같은 곳으로 향했다. 포장만 고급이었을 뿐,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이런 곳의 값은 하룻밤에 은자 서너 냥이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오십만 원에서 백만 원 사이. 고위 관리나 부유한 상인이 아니면 엄두를 못 내는 금액이었다. 단골이 되면 주모가 여인을 미리 준비해놓고, 손님이 좋아하는 술과 안주까지 맞춰놓았다. 일종의 VIP 서비스였다.
중급은 종로나 남대문 근처의 일반 색주가였다. 앞서 설명한 그 초가집 술집이 이 등급이었다. 여인들은 관기 출신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주모가 기본적인 예절과 대화법은 가르쳤다. 술을 따르는 법, 손님의 기분을 맞추는 법, 적당히 웃는 법, 눈을 마주치는 타이밍. 이런 곳의 값은 하룻밤에 은자 한 냥 안팎이었다. 지금 돈으로 십오만 원에서 이십만 원 정도. 중하급 양반이나 부유한 상인 정도가 드나들었다. 여인의 외모나 나이에 따라 값이 달라지기도 했다. 젊고 예쁜 여인은 은자 한 냥 반을 받았고, 나이가 있거나 인기가 없는 여인은 은자 반 냥으로 깎였다. 잔인하지만 그것이 시장의 논리였다.
하급은 청계천 다리 밑이나 성문 밖 변두리에 있었다. 이곳은 색주가라는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웠다. 움막 같은 곳에 거적을 치고 영업했다. 등불도 없이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여인들은 대부분 먹고살 길이 막힌 빈민 여성이었다. 오늘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절박함이 그들을 이곳으로 몰았다. 가격은 동전 몇 닢이면 되었다. 엽전 서너 개, 지금 돈으로 몇천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군인, 하인, 보부상, 날품팔이 같은 하층민이 주 고객이었다. 위생 관념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성병이 도는 것도 이 등급의 색주가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인들은 하루에 손님 대여섯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몸이 망가지는 속도가 빨랐고, 병이 들면 그대로 버려졌다.
이 시장에는 중개인도 있었다. 일종의 포주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뚜쟁이라고 불렀다. 야담집에 뚜쟁이라는 표현이 직접 나온다. 뚜쟁이는 대부분 나이 든 여인이거나 시장통에서 활동하는 중년 남자였다. 이들은 손님과 여인을 연결해주고 중개비를 챙겼다. 손님의 취향을 파악해서 맞는 여인을 소개하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었다. "나으리, 젊고 조용한 여인을 원하시오? 아니면 술도 잘하고 이야기도 재미있는 여인을 원하시오?" 뚜쟁이 중에는 한양 전역의 색주가 정보를 꿰고 있는 전문가도 있었다. 어느 골목에 새 여인이 들어왔는지, 어느 색주가가 단속을 앞두고 있는지, 어느 양반이 요즘 어디를 출입하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정보가 곧 돈이었다.
돈의 흐름도 복잡했다. 손님이 내는 돈이 전부 여인에게 가는 것은 아니었다. 주모가 절반 이상을 가져갔고, 뚜쟁이가 소개비를 떼고, 순라군이나 포도청 하급 관리에게 상납하는 돈도 있었다. 건물주에게 내는 세도 있었다. 여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전체의 삼분의 일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은자 한 냥을 받아도 손에 쥐는 건 은자 이삼 푼에 불과했다. 몸은 여인이 팔지만 돈은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구조. 조선의 뒷골목 경제는 그렇게 돌아갔다. 위에서 아래로 착취가 겹겹이 쌓인 구조였고, 가장 밑바닥에는 항상 여인들이 있었다. 이 구조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형태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 단속과 처벌, 그리고 뒷거래
조선 정부도 이런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헌부에서는 수시로 풍속 단속을 건의했고, 임금도 "음란한 풍속을 바로잡으라"는 하교를 내렸다. 실록을 보면 성종, 중종, 영조 대에 특히 풍기 단속 관련 기록이 많다. 영조는 직접 "한양의 골목마다 음사가 성행하니 이를 엄금하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포도청은 이 명을 받들어 색주가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단속의 실상은 법전에 적힌 것과는 사뭇 달랐다.
단속은 보통 이렇게 이루어졌다. 포도청 포졸 서넛이 밤에 골목을 돌았다. 색주가로 의심되는 집에 들이닥쳤다. 문을 차고 들어가면 손님은 창문으로 도망치고, 여인은 이불을 끌어안고 떨었다. 주모는 포졸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잡히면 처벌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대명률에 따르면 색주가 주모는 곤장 삼십 대에서 오십 대, 여인은 곤장 이십 대에서 삼십 대를 맞았다. 재범이면 형량이 배로 뛰었다. 삼범이면 유배까지 갈 수 있었다. 손님 양반은 이론적으로 관직 삭탈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법전대로라면 그랬다.
하지만 법전과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단속에는 항상 뒷거래가 따라붙었다. 포졸이 색주가에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귀띔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주모가 매달 포도청 하급 관리에게 상납금을 보냈기 때문이다. 상납 금액은 색주가의 등급에 따라 달랐다. 상급 색주가는 매달 은자 다섯 냥에서 열 냥, 중급은 은자 두세 냥, 하급은 엽전 몇 꾸러미를 바쳤다. 상납을 제때 하면 단속 날짜를 미리 알려주었다. 심지어 어느 골목을 돌 것인지까지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날만 영업을 쉬면 되었다. 여인들은 안쪽 방에 숨고, 주모는 문 앞에 빨래를 널어놓아 평범한 집인 척 했다. 상납을 밀리면? 그때 진짜 단속이 왔다. 포졸이 거칠게 문을 차고, 주모를 끌고 가고, 여인들을 포승줄로 묶었다. 결국 단속은 세금 징수의 다른 이름이었다. 상납금을 제때 내면 보호해주고, 밀리면 처벌하는 구조. 포도청 입장에서 색주가는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수입원이었다.
야담집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포도청 군관이 색주가를 단속하러 갔다가 안에서 자기 상관을 만났다. 상관은 관복을 벗고 평복 차림으로 여인 옆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군관은 얼어붙었다. 잡아야 할까, 모른 척해야 할까. 상관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여인은 상황을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주모는 문 뒤에서 숨을 죽였다. 결국 군관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잘못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나왔다. 다음 날 상관은 군관을 불러 은자 다섯 냥을 건네며 말했다. "어젯밤 고생이 많았네." 군관은 은자를 받아 품에 넣었다. 그날 밤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혔다. "해당 골목 순찰 완료. 특이사항 없음."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포도청의 단속 보고서를 보면 "특이사항 없음"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처벌의 불균형도 심각했다. 같은 색주가에서 잡혀도 신분에 따라 처벌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양반 손님은 대부분 무마되었다. 체면을 내세워 "내가 누군지 아느냐" 하면 포졸이 물러서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설령 잡혀가더라도 집안에서 돈을 풀어 없던 일로 만들었다. 양반가의 하인이 포도청에 달려가 은자를 건네면, 기록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반면 여인들은 곤장을 맞거나 관비로 끌려갔다. 곤장 삼십 대를 맞으면 살갗이 터져 피가 흘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 다시 색주가로 돌아가야 했다. 주모는 쫓겨났다가 한 달 뒤 다른 골목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이전 단속에서 압수당한 살림을 다시 장만하고, 새 여인을 들이고, 포도청에 다시 상납을 시작했다. 끝없는 반복이었다.
가끔 큰 단속이 있었다. 임금이 직접 "풍기 문란을 엄단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리면 포도청이 대대적으로 움직였다. 이때는 색주가 수십 곳이 한꺼번에 폐쇄되고, 주모와 여인들이 줄줄이 잡혀갔다. 종로에서 남대문까지 줄줄이 포승줄에 묶인 여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구경꾼들이 바라보았다. 양반들은 혀를 차며 "저것들이 풍속을 더럽혔으니 마땅하다"고 했다. 그 양반들 중 상당수가 불과 며칠 전 그곳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대대적 단속의 효과는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석 달이면 다시 등불이 켜졌고, 반년이면 예전 규모를 회복했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수요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공급은 반드시 돌아왔다. 조선 오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이 시장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 어둠 속의 사람들
지금까지 한양 뒷골목의 구조와 양반들의 이중생활, 단속의 실상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작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빠져 있다. 그곳에 있던 여인들이다. 역사는 늘 권력자의 시선으로 기록되었지만, 진짜 이야기는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다.
색주가의 여인들은 대부분 선택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그곳에 있었다. 가장 흔한 경우가 빚이었다. 아버지가 빚을 지고 도망가면, 빚쟁이가 딸을 데려갔다. 열여섯, 열일곱에 색주가에 팔려온 소녀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열네 살, 열다섯 살도 있었다. 빚을 갚을 때까지 나갈 수 없었다. 문제는 빚이 줄어들지 않는 구조라는 것이었다. 주모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비용, 옷값, 화장품값, 머리 손질비, 방 사용료를 전부 빚에 더했다. 한 달에 은자 두 냥을 벌어도 은자 세 냥이 빚에 붙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빚은 오히려 늘어났다. 주모가 장부를 보여주면서 "아직 이만큼 남았다"고 할 때마다 여인들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이었다. 현대의 사채 구조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더 잔인했다. 최소한의 법적 보호조차 없었으니까.
남편을 잃은 과부도 많았다. 조선에서 과부의 삶은 가혹했다. 재가가 금지되거나 극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으면 평생을 혼자 살아야 했다. 열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과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집에서 쫓겨나거나, 시집도 친정도 없는 과부가 먹고살 길은 많지 않았다. 바느질이나 빨래로는 겨우 죽을 한 그릇 먹을 수 있었다. 결국 뒷골목으로 향했다. 이들은 낮에는 동네 아낙으로 살면서 밤에만 색주가에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가 잠든 뒤에 몰래 나가서, 새벽닭이 울기 전에 돌아오는 생활. 이중생활은 양반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깨어서 "엄마, 어디 갔다 왔어?"라고 물으면 "뒷간에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 거짓말 한마디가 가슴에 못을 박았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몰락한 양반가 여인들의 경우였다. 아버지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역적으로 몰리면 가족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제까지 비단옷을 입던 여인이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았다. 양반가에서 배운 것이라곤 글 읽기와 바느질, 그리고 예법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한 끼 밥도 해결할 수 없었다. 야담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조참판을 지낸 대감의 셋째 딸이 아버지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노비로 전락했다. 관비로 끌려가다가 도중에 도망쳐 한양 남촌 골목의 색주가에 숨어들었다. 주모는 그녀의 하얀 손과 단정한 말투를 보고 출신을 짐작했지만 묻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녀는 손님에게 술을 따르면서도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전 생활의 흔적이 몸에 배어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손님 중 한 명이 그녀의 시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이 여인이 어쩌다 이곳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눈물을 흘린 그 손님도 밤이 지나면 돌아갔다. 아무도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동정은 잠깐이었고, 현실은 냉혹했다.
여인들의 몸은 혹사당했다. 위생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대에, 성병은 일상이었다. 야담집에는 "꽃병"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성병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매독이 조선 후기에 널리 퍼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색주가가 주요 전파 경로 중 하나였다. 치료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수은을 바르거나 약초를 달여 마시는 정도였는데, 효과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병이 깊어져 얼굴에 흉터가 지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면 색주가에서도 쫓겨났다. 손님을 받지 못하면 돈이 안 되니까. 쫓겨난 뒤에는 청계천 다리 밑에서 구걸하다 쓸쓸히 죽는 것이 일반적인 결말이었다. 이름도 없이, 기록도 없이, 한양의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극소수지만, 색주가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단골 손님이 여인에게 정이 들어 빚을 갚아주고 첩으로 데려가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첩의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매일 밤 모르는 남자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장사 수완이 뛰어난 주모 중에는 색주가를 운영하며 재산을 모아 정식 주막을 차리고 떳떳한 장사꾼이 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야담집은 이런 여인을 두고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라고 표현했다. 진흙이 더럽다고 연꽃마저 더러운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경지략은 마지막에 이렇게 적고 있다. "한양의 밤을 밝히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골목의 등불이며, 그 등불 아래에는 기록되지 못한 수천의 이야기가 묻혀 있다." 우리가 오늘 들은 것은 그 수천 이야기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조선의 역사는 양반의 역사로만 기록되었지만, 진짜 역사는 골목에 있었다. 궁궐의 지붕 아래가 아니라, 초가집 처마 밑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 역사를 온전히 보는 일이다. 빛만 보면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어둠까지 함께 봐야 비로소 전체가 보인다. 그것이 오늘 이 이야기를 들려드린 이유다.
유튜브 엔딩멘트
유교의 나라 조선, 그 빛나는 역사 뒤에는 기록되지 못한 어둠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조선을 다르게 보는 계기가 되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다음에는 조선 양반가 여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다뤄보겠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