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귀신이면 어때, 예쁘면 그만이지 (출처-천예록)

    폐가에서 처녀 귀신을 만났으나 무서워하기는커녕 사랑을 나눈 선비. 귀신이 감동해 숨겨진 보물을 알려주어 부자가 되고 제사도 지내주는 훈훈한 결말.

    태그

    #귀신, #처녀귀신, #폐가, #오컬트, #로맨스, #보물, #부자되기, #제사, #훈훈한결말, #오디오드라마, #옛날이야기, #천예록, #야담, #조선시대
    #귀신 #처녀귀신 #폐가 #오컬트 #로맨스 #보물 #부자되기 #제사 #훈훈한결말 #오디오드라마 #옛날이야기 #천예록 #야담 #조선시대

     

     

    후킹멘트

    비 내리는 밤,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폐가에 한 선비가 발을 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 귀신이 나온다며 말렸지만, 그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났다.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다. 무서워하지 않은 남자와, 그런 남자를 처음 만난 귀신의 이야기다. 사랑으로 시작해 보물로 끝나는, 아주 오래된 밤의 기록.

    ※ 1: 폐가로 향하는 선비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산길은 진흙으로 질척거렸고,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어깨를 사정없이 때렸다. 스물여덟 살의 선비, 한생은 등에 진 책상자를 고쳐 멘 채 걸음을 옮겼다.

    한양에서 치른 과거에서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책상자는 빗물을 먹어 무거워졌고, 짚신은 이미 발가락을 내놓고 있었다. 사흘째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다. 스치는 마을마다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낯선 길손을 재워 주는 집은 없었다. 세상이 각박해진 것이 그가 낙방한 탓만은 아니었다.

    '이대로면 오늘 밤은 산에서 얼어 죽겠구나. 과거에 떨어지더니 목숨까지 떼어 놓는단 말인가.'

    한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삼 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논밭은 남의 손에 넘어갔고, 어머니는 먼 친척 집에 몸을 의탁했다. 남은 것은 낡은 책상자 하나와, 언젠가는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오기뿐이었다.

    '그 오기마저 이 비에 씻겨 내려가겠군.'

    그가 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빗줄기 너머로 희미하게 기와지붕 하나가 보였다. 담장은 무너지고 대문은 반쯤 부러져 있었지만, 그래도 지붕이 있는 집이었다. 한생은 허둥지둥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선비님!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뒤를 돌아보니 비를 그대로 뒤집어쓴 노인이 우산도 없이 뛰어오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한생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 집은 못 들어갑니다. 폐가요. 삼 년 전부터 아무도 못 들어가는 집이라오."

    "왜 그러시오? 지붕도 멀쩡한데."

    "지붕이 멀쩡하다고 사람이 사는 게 아닙니다. 그 집에는... 귀신이 나온다 하오."

    노인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빗소리 사이로 그 말이 또렷하게 박혔다.

    "처녀 귀신이오. 밤이면 곡소리가 들리고, 등불이 켜지고, 창에 여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하오. 재작년에 들어갔던 행상인은 다음 날 아침 넋이 빠진 채로 나왔고, 작년에 들어간 중은 사흘 만에 열이 올라 죽었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예 그 담장 근처에도 가지 않소."

    "그 귀신이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하던가요?"

    "그건... 아니오. 이상하게도,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나오면, 살던 집이 낯설어진다고."

    "낯설어지다니."

    "그냥 그렇다 하오. 나온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눈만 멍하니 있지요."

    한생은 어둠 속의 기와지붕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빗줄기가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인장. 저는 사흘을 굶었고, 옷은 흠뻑 젖었고, 이대로 서 있으면 오늘 밤 안에 얼어 죽습니다. 귀신이 나오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섭소이다."

    "허, 허허... 참말로 무서운 걸 모르는 양반이로구먼."

    "무섭긴 하오. 다만 순서가 다를 뿐이지."

    노인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한생을 한참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등을 향해 한생이 조용히 말했다.

    "걱정 마시구려. 내일 아침에 살아서 나오면, 그때 밥 한 끼 얻어먹으러 가겠소."

    노인은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품에서 조그만 부적 하나를 꺼내 한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뭡니까."

    "무당이 나눠 준 것입니다. 저도 안 믿습니다. 하지만 없으면 불안해서요. 가지세요."

    한생은 부적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노인의 손에 도로 쥐여 주었다.

    "왜 그러시오!"

    "이걸 가지면, 혹시 그 귀신을 만나도 제가 겁을 낼까 봐서요."

    "허... 허허허. 참말로 별난 양반이로다."

    부러진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당에는 잡초가 무릎까지 자라 있었다. 우물은 이끼로 덮였고, 마루 기둥 하나는 삭아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안채의 방 하나는 문이 제대로 닫혀 있었고, 들여다보니 아궁이도 멀쩡했다.

    '버릴 집이 아니군.'

    그는 마른 나뭇가지와 부러진 마루널을 모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젖은 옷을 벗어 불가에 걸치고, 책상자에서 꺼낸 붓과 벼루를 방석 위에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품에 남은 마지막 주먹밥 하나를 꺼내 반으로 갈랐다. 한 조각은 입에 넣고, 다른 한 조각은 종이에 싸서 아궁이 옆에 두었다.

    '누가 오면 주려고 했는데. 오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불이 타오르자 방 안이 붉게 물들었다. 빗소리는 지붕을 두드리며 조금씩 잦아들었고, 한생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삐걱.

    방문이 저절로 열렸다. 아니, 저절로가 아니라누군가 밖에서 밀었다. 차가운 바람이 촛불을 흔들었고, 방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빨려 나갔다.

    한생은 눈을 떴다.

    문 앞에 여인이 서 있었다.

    소복을 입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고, 발은 땅에 닿지 않은 듯 흰 치맛자락만 살짝 흔들렸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눈동자는 검었고, 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무서웠다. 무서워야 했다. 그런데 무섭지가 않았다.

    아름다웠다. 그것도 아주 오래, 오래 바라보게 되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물에 젖은 명주처럼 낮고 가늘었다.

    "...놀라지 않으시오?"

    한생은 한참 그 얼굴을 보다가, 아궁이 옆에 싸 둔 주먹밥을 집어 들며 말했다.

    "밥은 아직 따뜻하오."

    ※ 2: 두려움 대신 담소를 나눈 밤

    여인은 그 말에 잠시 굳어 있었다. 마치 처음 듣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이 마루를 밟을 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치맛자락이 흔들릴 뿐이었다.

    "저는... 귀신이오."

    "그러시겠지요."

    "사람을 해치는 귀신이오."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한생은 아궁이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앉으시오. 불이 따뜻하오."

    여인은 한참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치맛자락이 땅에 닿았지만 흙 한 톨 묻지 않았다. 한생이 주먹밥 반쪽을 내밀자 여인은 그것을 받아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걸...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배고플 것 같아서."

    "귀신은 밥을 먹지 않습니다."

    "그럼 들고만 계시오. 손이 시려 보이니."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아주 조금 떨렸다. 한생은 장작을 하나 더 넣고, 벽에 걸어 둔 겉옷을 집어 여인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젖었소. 이걸 걸치시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요?"

    "저는 귀신이오. 사람을 홀리는 귀신이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시오?"

    한생은 불을 보며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귀신이면 어때, 예쁘면 그만이지."

    여인은 숨을 멈췄다. 숨을 쉬지 않는 몸인데도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주 작은 웃음이었다. 오래 웃지 않아서 근육이 굳은 사람의, 어색하고 서툰 웃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저도 그런 귀신은 처음 봅니다."

    "...이름은 연이라 합니다."

    "저는 한생이라 하오. 한여울의 한, 살 선비 생."

    연이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조용히 굴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찌 이 밤에 이런 곳에 계십니까."

    "과거에 떨어졌소.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하룻밤 신세를 지려는 것이오."

    "낙방하셨습니까."

    "그렇소. 삼 년을 준비했는데, 시험지에 손이 떨려서 첫 구절을 세 번이나 고쳐 썼지. 그게 화근이었소."

    연이는 잠시 그를 보았다.

    "안됐습니다."

    "아니오. 나보다 안된 것은 이 비 맞고 다니는 귀신이오."

    연이가 다시 웃었다. 이번엔 조금 더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선비님은 무슨 글을 쓰십니까."

    "글은 못 쓰오. 다만 읽는 것은 좋아하오."

    한생은 책상자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비에 젖지 않은 몇 장 중 하나였다. 그는 붓을 들어 먹을 갈고, 잠깐 생각하다가 한 줄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었다.

    "빈집에 비가 오니 등불 하나 남았고,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겠네."

    연이는 그 구절을 조용히 따라 읽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겠다는 구절... 저는 그게 마음에 듭니다."

    "왜요."

    "사람들은 저를 볼 때 이미 정해 놓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것은 귀신이다, 하고. 선비님은 정해 놓지 않으셨습니다."

    연이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빗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었다.

    "저도 한때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머니가 불러 주시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봄에 살구꽃이 피면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불러 주시겠소."

    "오래 불러 보지 않아서 가사가 다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대로 불러 주시오."

    연이는 한참 망설이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가사는 중간중간 끊겼고, 끝은 흐려졌다. 그래도 한생은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박수를 쳤다.

    "잘 부르시오."

    "아닙니다. 엉망이었습니다."

    "엉망인 것도 오래 두면 귀해지는 법이오. 이 세상에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면, 그건 흉이 아니라 보물이오."

    연이는 그 말에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만지려다가, 손끝이 닿기 직전에 멈췄다.

    "제 손은 차갑습니다."

    한생은 그 손을 잡았다. 정말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놓지 않았다.

    "따뜻해질 때까지 잡고 있으면 되지."

    연이는 그 손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밤, 두 사람은 아궁이 앞에서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한생은 고향의 논과 어머니 이야기를 했고, 연이는 마당의 우물이 예전에는 어찌나 맑았는지, 봄이면 살구나무에 꽃이 어찌나 많이 피었는지를 이야기했다. 이야기 끝에는 항상 같은 문장이 붙었다.

    "그때는 참 좋았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 창호지 사이로 스며들자 연이가 벌떡 일어섰다.

    "가야 합니다."

    "어디로."

    "어둠으로. 저는 빛 속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한생은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연이는 문턱에서 한 번 뒤돌아보았다.

    "다음 밤에도... 오시오."

    "오리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선비님은 이 마을 사람이 아닙니다. 언젠가 떠나실 분입니다."

    "그러면 그 언젠가까지 오겠소."

    연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한생은 한참 문밖을 보다가 방 안으로 돌아왔다. 아궁이는 재만 남았고, 방석 위에는 그의 붓과 벼루만 놓여 있었다.

    '꿈이었나.'

    그때 발치에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궁이 옆에 싸 두었던 종이. 주먹밥은 그대로 있었다. 다만 그 위에 젖은 흰 꽃잎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종이 뒷면에, 아주 가늘고 서툰 글씨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내일도 비가 오면 좋겠습니다.

    한생은 그 종이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 3: 연이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사연

    아침이 밝았다. 한생은 대문을 밀고 나왔다. 비는 그쳤고, 마을 사람 셋이 담장 밖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어제 그 노인도 있었다. 노인은 한생의 얼굴을 보고, 팔과 다리를 보고, 다시 얼굴을 보고 나서 뒤로 벌렁 나자빠질 뻔했다.

    "사, 살아 계시오!"

    "그러하오. 그리고 밥 한 끼 얻어먹으러 왔소."

    마을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한생을 주막으로 데려갔고, 국수 한 그릇이 나왔다. 한생이 국수를 먹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문 밖에서는 아이들이 눈만 내밀고 있었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셨다고요?"

    "그러했소."

    "귀신을... 보셨습니까?"

    한생은 잠깐 젓가락을 멈췄다.

    "보았소. 아주 아름다운 귀신이었소."

    주막 안이 조용해졌다. 주막 주인은 국수를 담던 손을 멈췄고, 노인은 헛기침을 했다. 그 침묵이 한생에게는 처음이었다.

    "선비님. 그 집에는 들어가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러시오."

    "그 집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하루는 멀쩡하다가, 이틀째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사흘째에 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소."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눈물만 나온다고 합니다."

    그날 오후, 마을의 무당이 한생을 찾아왔다. 지팡이를 짚은 늙은 여인이었다. 무당은 한생 앞에 앉아 그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홀렸습니다."

    "홀린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눴소."

    "선비님. 그 집의 것은 예사 귀신이 아닙니다. 삼 년 전부터 그 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을 불러들여 정기를 빨아 먹는 것이오."

    "삼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때부터,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집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그 집을 보지 않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모두가 보게 되었습니다."

    무당은 손끝으로 허공을 눌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래된 빈집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것은 귀신이 힘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 귀신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죽어서도 이름 한 번 못 얻고 담장 안에 갇혀 있어야 하오."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럼 묻지 마시오."

    무당은 잠시 한생을 보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선비는 이미 반쯤 저쪽으로 넘어갔습니다. 오늘 밤, 저를 그 집에 데려가 주시오. 굿을 하고 그것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선비도 사흘 뒤에 방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이 마을 사람들 차례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노인이 한생의 소매를 잡았다.

    "선비님. 제발. 저희는 그 집을 부술 수도 없습니다. 작년에 헛간을 부수려던 청년은 곡괭이를 들고 가서 그대로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집은 저희 손이 닿지 않는 곳입니다."

    한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마시오."

    "선비님"

    "그 집은 아직 사람이 살고 있소. 비록 살이 없을 뿐."

    "미친 양반이로다!"

    누가 그렇게 외쳤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생은 그 시선을 등지고 주막을 나왔다. 뒤에서 국수 한 그릇 값을 치르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대신 내주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한생은 다시 그 폐가로 돌아갔다. 무당과 마을 사람들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숨을 곳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연이는 이미 방 안에 있었다. 아궁이 옆에 앉아, 어제 걸쳐 준 겉옷을 개켜서 무릎에 올려 두고 있었다.

    "오늘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요."

    "굿을 하겠다고 하더군."

    연이의 어깨가 굳었다.

    "...그러실 거지요. 어차피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저는 익숙합니다."

    "익숙하다고 하지 마시오."

    "선비님은 저를 모릅니다."

    "그러니 말해 주시오."

    한생은 연이 앞에 정면으로 앉았다. 아궁이 불이 두 사람의 얼굴을 붉게 비췄다.

    "연이. 나는 당신이 왜 이 집에 갇혔는지 모르오. 굿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변호해 줄 말도 없소. 그러니 말해 주시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는지. 무엇을 기다리는지."

    연이는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죽은 것은... 삼 년 전이 아닙니다."

    "...그럼."

    "훨씬 오래전입니다. 언제였는지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이만큼 오래 혼자 있으면, 시간이라는 게 사람처럼 흐르지 않습니다. 밤이 끝나면 다음 밤이 오고, 그 밤이 또 끝나고. 그러다 어느 날 창밖에 낯선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때야 알았습니다. 아, 내가 이 방에서 아주 오래 있었구나, 하고."

    한생은 숨을 죽였다.

    "난리가 났던 해였습니다. 아버지는 마당 우물 옆에 궤를 하나 묻고, 이틀 뒤에 돌아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방에서 기다렸습니다. 사흘을 기다렸고, 닷새를 기다렸고, 열흘을 기다렸습니다. 열엿새째 되는 날, 저는 혼자 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연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묻히지도 못한 채 이 방에서 죽었습니다. 이름도 없이, 무덤도 없이. 그래서 지금도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그 궤가 땅속에서 썩어 가는 동안, 저는 아직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눈물을 흘릴 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이 한생에게는 눈물보다 더 무서웠다.

    "제가 왜 아직도 이 집을 떠나지 못하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창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이 담장 너머로 붉게 번졌다. 무당의 방울 소리가 밤을 갈랐다.

    "선비님! 안에 계시오?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한생은 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연이를 보았다. 연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스쳤다. 죽은 자의 두려움이 아니라,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산 자의 두려움이었다.

    "선비님.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 4: 산 자와 죽은 자의 언약

    한생은 마당으로 걸어 나가 횃불을 든 사람들 앞에 섰다. 스무 명쯤 되었다. 앞줄에는 삽과 곡괭이를 든 청년들이, 담장 밖에는 아이들이 목을 빼고 있었다. 무당은 방울을 들고 맨 앞에, 노인은 맨 뒤에서 손을 비비고 있었다.

    "선비님. 비키시오. 이 집을 정리하러 왔습니다."

    "무엇을 정리하시겠소."

    "쫓아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생은 횃불을 든 얼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굳은 얼굴들 속에 무서움보다 큰 것이 있었다. 죄책감이었다.

    "내가 하나 묻겠소. 이 집에 물을 길러 오던 여인은 누구였소."

    무당의 방울이 멈췄다.

    "...왜 그런 것을 묻습니까."

    "마당에 우물이 있소. 그런데 두레박줄이 아직 걸려 있소. 삼 년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집에. 그럼 이 우물을 쓰던 사람이 있었다는 뜻 아니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집은 삼 년 전에 비었소. 그전에는 누가 살았소. 어른 하나에 아이 하나, 그렇지 않소."

    "...선비님, 그건."

    "내가 그 방에서 들었소. 아버지가 궤를 하나 묻고 이틀 뒤에 돌아오겠다고 했다고. 그 아버지는 어디 갔소. 어째서 아무도 그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소."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무당이 방울을 세게 흔들었다.

    "죽은 자의 말을 듣고 산 자를 의심하면 안 됩니다. 귀신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 그렇게 말하게 만드는 것이오."

    "그럼 그해 난리 때 이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피했소."

    노인은 한 걸음 물러섰다. 옆에 있던 사내가 툭 내뱉었다.

    "다 산으로 갔지. 그 집만 못 갔소. 늙은이가 아파 누워 있었거든. 닷새 뒤에 내려와 보니 마을은 다 탔는데 그 집만 남아 있었소. 다들 처음엔 귀신이 아니라 저주라고 했지."

    "그리고 그 아이는."

    "...굶어 죽었겠지. 우리가 무슨 수로."

    한생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아이는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죽었소. 열엿새를 기다렸소. 그런데 돌아온 사람들이 그 집을 보고 한 말이 '저주'였소. 그러니 그 아이가 어찌 되었겠소. 그 아이는 저주받은 집에 갇힌 것이 아니라, 아무도 자기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서 갇힌 것이오."

    마당이 조용해졌다. 횃불 타는 소리만 들렸다. 무당이 방울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리고 마을의 나이 많은 여인, 무당이 앞으로 나왔다.

    "선비님. 저도 이 마을 사람입니다. 그해를 겪은 사람으로서 하는 말입니다."

    "말씀하시오."

    "우리가 이 집을 무서워한 것은 저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날 때마다 문 안에서 뭔가가 우리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잊기로 했습니다. 잊으면 안 보고, 안 보이면 안 무서우니까."

    "그런데 그해 겨울, 지나가던 중 하나가 하룻밤을 청했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소. 그 중은 사흘 만에 죽었소."

    "...사실입니다."

    "그 뒤에 행상인이 들어갔고, 삼 년 동안 이 집은 이 마을의 금기가 되었소. 사람을 죽인 귀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금기요. 이제 그 귀신을 쫓아내면, 이 마을은 삼 년 동안 미뤄 온 일을 오늘도 미룬 셈이 되겠지요. 그러니 굿을 하시오. 대신 내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시오."

    한생은 방 쪽을 돌아보았다. 문은 열려 있었고, 불빛이 문지방까지 나와 있었다.

    "그 아이를 쫓아내면 이 마을은 편해지겠소. 다만 죽은 아이는 영원히 이름을 잃을 것이오. 나는 이 집에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나그네요. 결정은 이 마을 사람들이 하시오."

    무당은 오래 한생을 보다가 방울을 허리춤에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나자 삽과 곡괭이를 든 손들이 힘을 풀었다.

    "...선비님은 저보다 무당이십니다."

    "아니오. 나는 그냥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오."

    그때 방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주 낮고, 오래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제 이름은... 연이입니다."

    마당의 모든 사람이 돌을 맞은 듯 굳었다. 담장 밖 아이들이 울음을 삼켰다.

    "물을 길으러 오신 분들은 저를 아이 취급했습니다. 저는 이미 열여섯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궤를 묻고 이틀 뒤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지켰습니다. 열엿새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흐느꼈다. 맨 뒤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그해에 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세 번 두드렸습니다. 대답이 없어서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 안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돌아섰습니다."

    "대답이 없었던 것이 아니오."

    "...네."

    연이의 목소리가 한 번 끊겼다가 이어졌다.

    "두드리지 않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드린 분은 당신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삼 년 동안, 저는 그 문 두드리는 소리를 기억하며 지냈습니다."

    한생은 노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 남은 사람 중에, 이 집에 살던 아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소?"

    아무도 없었다. 한생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름부터 만들어 주어야겠소."

    "이름을... 만들다니."

    "이름이 없는 아이는 여기서 나가지 못하오. 그러니 이 마을이 이름을 하나 지어 주시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제사를 지내시오. 오늘 밤이 아니어도, 내일 밤이어도 좋소. 다만 이 집에서, 이 사람들이, 직접."

    무당이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봄에 살구꽃이 피던 집이었습니다. 저는 그 꽃을 기억합니다. 이 집 살구나무가 마을에서 제일 예뻤습니다."

    연이의 목소리가 새벽 물처럼 흘렀다.

    "연이입니다. 저는 연이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하나둘, 횃불을 땅에 꽂았다. 마당이 조금 밝아졌다.

    "살구나무 자리에 새로 심으면 되겠습니다."

    그날 밤 아무도 굿을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 집을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당에 둘러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그해 난리에 누가 어디로 피했고, 누가 돌아오지 못했고, 누구의 이름이 지워졌는지. 한생은 촛불 하나를 켜 두고 문을 열어 둔 채 그 이야기들을 들었다.

    ※ 5: 숨겨진 보물과 마지막 시련

    닷새가 지났다. 마을 사람들은 매일 밤 한 사람씩 이 집에 왔다. 무섭지 않다고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지 않으면 더 무서울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은 첫날 밤에 와서 마당에 앉아 이런 말을 했다.

    "선비님. 그 궤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들었소. 아버지가 묻었다는 궤."

    "그 아버지가 무엇이었는지 아시오?"

    한생은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손끝으로 우물 쪽을 가리켰다.

    "그 어른은 이 마을에 한 이 년쯤 살았습니다. 말이 없어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다만 밤이면 등불을 켜고 뭔가를 썼습니다. 그해 봄에 보따리를 들고 떠났다가, 난리 소식이 나자 다급히 돌아와 우물가에 뭔가를 묻고 다시 떠났지요."

    "그날 무슨 말을 하던가."

    "했습니다. 이 집에 있던 그 아이에게 했습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이틀 안에 온다. 문을 잠그고 어디도 가지 말라고."

    한생은 우물가로 걸어갔다. 우물은 오래 방치되어 뚜껑이 썩어 있었으나 돌틈은 단단했다. 그는 손에 남은 흙을 털며 말했다.

    "그 어른은 돌아오지 못했소. 난리 중에 죽었을 것이오."

    "그렇겠지요."

    "그런데 왜 이 마을 사람들은 그 궤를 몰랐소. 묻는 것을 봤다면 나중에 파 보았을 텐데."

    "봤습니다. 저를 비롯해 셋이 봤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첫 번째 사람이 죽었습니다. 장티푸스였습니다. 그다음 날 두 번째가 앓아누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사람 중에 그 아이도 있었겠지요."

    "네. 세 번째가 그 아이였습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연이는 아궁이 옆에 앉아 있었다. 요즘은 해가 진 뒤에도 아주 흐릿하게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이 집에서 조금씩 풀려나고 있다는 표시였다.

    "연이. 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오?"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한 번, 밤에 깨어 보니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편지를 쓰고 계셨습니다. 봉투에 크게 쓴 글자 하나는 '李'였습니다. 그 옆에 작게 다른 글자도 있었는데, 글씨를 배우지 못해서 겨우 성 하나만 알아보았습니다."

    한생은 잠시 생각하고, 마을의 옛 기록을 보여 달라고 청했다. 노인이 서당에 보관된 문서 꾸러미를 가져왔다. 그해 봄, 관에서 내려온 방문 기록이었다. 글씨는 흐릿했고 종이는 좀먹었지만, 읽어 나가던 한생의 손이 멈췄다.

    "여기 있소. '이(李) 정언(正言). 병조 참의 이공의 아들. 상소 후 은거.' 그리고 난리 직전에 이 사람이 남긴 첩자(帖子)가 붙어 있소."

    문서는 몇 줄 되지 않았다. 한생이 천천히 읽었다.

    "역적의 무리가 관향(官鄕)을 훔쳤으니, 그 문서는 사초(史草)에 기재되어 있다. 후일 이 문서를 얻는 자는 반드시 임금께 아뢰어 그 죄를 밝힐지어다. 만일 내가 죽고 이 문서가 묻힌 채 남는다면, 이 마을 한 집의 아이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한생은 말을 멈췄다. 노인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어른은 증거를 하나 묻었소. 그리고 그 증거를 지키는 아이를 하나 남겼소. 그 아이는 그냥 묻힌 것이 아니오. 지키라고 남겨진 것이오."

    "...그 아이는 그걸 평생 몰랐겠지요."

    "몰랐소. 그리고 죽었소."

    연이는 손끝으로 아궁이 옆 벽을 만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나는 여기서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사람들에게 한 사람씩 도구를 들려 세웠다. 삽, 곡괭이, 지게. 노인이 뒤에서 말했다.

    "선비님. 정말로 파시겠습니까."

    "파야 하오. 그 아이는 그 궤 때문에 여기 갇혔소. 아무도 그 궤를 꺼내 주지 않았으니, 아무도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소. 파서 꺼내는 것이 그 아이를 이 집에서 나가게 하는 일이오."

    그들은 밤을 밝혀 우물 옆을 팠다. 서른 자를 팠을 때, 삽이 무언가 단단한 것에 부딪혔다. 참나무로 짠 함이었다. 한생은 흙을 쓸어내고 못을 하나씩 뽑았다.

    함을 여는 순간, 서 있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흙 속에서 올라온 냄새는 오래된 종이 냄새였고, 그 안에는 물에 젖지 않은 문서 열여섯 장과, 헝겊에 싼 것이 하나 들어 있었다. 문서는 정갈한 글씨로 쓰인 상소문이었다.

    한생은 내용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읽는 동안 옆에 선 노인이 무릎을 꿇었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앉았다. 이것은 그 마을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해 죽은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였다.

    문서를 다 읽었을 때, 한생은 헝겊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서 조그만 은패(銀牌) 하나와, 오래된 엽전 무더기, 그리고 금실로 짠 노리개 하나를 꺼냈다. 마을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이게... 이게 그 보물입니까."

    "돈은 보물이 아니오. 이 문서가 보물이오."

    한생은 문서를 다시 헝겊에 싸서 품에 넣었다. 그리고 노리개를 손에 들고 아궁이 쪽을 돌아보았다. 연이가 서 있었다. 이제는 아주 옅게, 봄 안개 같은 모습으로.

    "연이. 이 노리개는 아버지가 당신에게 두고 간 것이오."

    연이는 손을 내밀지 못했다. 대신 아주 오래 그 노리개를 보았다.

    "...제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가져야겠지."

    "저는 아무것도 만질 수 없습니다."

    한생은 노리개를 품에 넣었다.

    "그럼 내가 가진 채로 두겠소. 당신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걸 만지겠소."

    연이는 그 말에 아주 오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큰 소리로 말했다.

    "선비님. 저에게 제사를 지내 주시겠습니까."

    마을은 그 말을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이 먼저 고개를 숙였고, 무당이 뒤따랐고, 아이들까지 따라 숙였다.

    한생이 대답했다.

    "지내 드리겠소. 이름을 새겨서, 무덤을 만들어서, 해마다."

    ※ 6: 부자가 된 선비, 그리고 마지막 밤

    그해 가을, 마을 입구에 조그만 무덤이 생겼다. 비석에는 '이씨 연(李 娟)의 묘'라고 새겼다. 팔월 보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냈다. 제사상에는 살구를 올렸다. 봄에 새로 심은 살구나무는 아직 어린 채였으나, 그해에는 잎만 무성했다.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처음 지낸 밤, 마당에는 아주 오랜만에 등불이 켜졌다. 연이는 그 등불 옆에 서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연이에게 고개를 숙였고, 연이는 그 인사를 다 받아 주었다.

    한생은 마을의 어른들을 모아 놓고 문서를 펼쳤다.

    "이 문서는 내가 임금께 올리겠소. 그러려면 한양에 가야 하오. 이 집에 두면 또 묻히게 될 것이오."

    "그러면, 귀신은."

    "이제는 나가실 수 있소. 이름을 얻었으니."

    연이가 대답했다.

    "...나가면 어디로 가는지 압니까."

    "모르오. 나도 모르오. 다만 이 집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오."

    "선비님은 저를 떠나시는 겁니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녀오는 것이오. 이 문서를 올리고 벼슬을 받든 못 받든, 나는 돌아오리다. 그리고 여기 남아서 이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겠소. 살구꽃 지는 것도 보고."

    연이는 한참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처음 만난 밤처럼 웃었다.

    "그 말,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지키오. 못 지키면, 내 이름도 잊히겠지."

    "그건 싫습니다. 선비님 이름은... 저는 잊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나는 한양으로 가서 과거를 한 번 더 치르겠소.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도록, 시험지에 내 이름과 당신 이름을 나란히 써 놓고 시작하겠소."

    "그게 무슨."

    "그러면 손이 안 떨릴 것이오."

    그 말에 연이가 웃었고,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다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이 밤에 오래 남았다.

    이튿날 아침, 한생은 책상자를 멨다. 그리고 이번에는 짚신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새로 삼아 준 신을 신었다. 나귀도 하나 얻었다. 전날 무당이 자기 집 나귀를 끌고 와서, 말없이 고삐를 쥐여 주었다.

    "고맙소."

    "무당이 나귀를 준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노인이 뒤따라 나왔다. 그리고 품에서 그 부적을 다시 꺼내 한생에게 내밀었다.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버릴까 봐 못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받으시겠습니까."

    한생은 이번에는 받았다. 품에 넣고 노인에게 말했다.

    "이것을 보면 죽은 사람을 생각하겠소. 그러면 좋은 일이오."

    한양에서 한생은 그 문서를 올렸다. 사흘 만에 사정을 아는 관리 하나가 그를 찾아왔고, 한 달 뒤에는 상소가 임금의 눈에 들어갔다. 오래전 난리 때 관향을 훔친 무리들이 드러났고, 한생은 그 공으로 벼슬을 하나 받았다. 하지만 그는 벼슬을 오래 하지 않았다. 한 해를 채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한생은 마을에 조그만 글방을 열었다. 아이 열넷이 모였다. 그는 이름 없는 아이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살구나무 아래에 돌을 하나씩 놓았다.

    그리고 어느 봄, 살구나무에 꽃이 처음 피었다. 꽃이 핀 날 밤, 한생은 마루에 앉아 있었다. 연이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등불을 켜지 않아도 모습이 보였다.

    "선비님. 저는 이제 가야 합니다."

    "...그러하오."

    "무섭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마당이 이렇게 밝으니."

    "가서 무엇을 하시겠소."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만나겠지요."

    연이는 웃었다.

    "그때는 제가 선비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내가 알아보겠소. 이름을 부르면 되지."

    "그 이름을 잊으시면."

    "내가 잊겠소. 그리고 이걸 만지겠소."

    한생은 품에서 노리개를 꺼냈다. 그 노리개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 금실이 빛났다. 연이는 그 노리개를 오래 보고, 그리고 마루 끝에서 일어섰다. 꽃잎이 바람에 흩어져 마당을 가로질렀다.

    "선비님. 고맙습니다."

    "나도 고맙소. 그 밤에 문을 열어 주셔서."

    "제가 연 문이 아닙니다."

    "그래도 열렸소."

    연이는 웃으며 사라졌다. 흔적 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처럼.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살구나무 아래에 흰 꽃잎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밟지 않았다. 그해 여름, 한생은 무덤 옆에 조그만 당집을 하나 지었다. 제사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마을이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한생은 머리가 희어졌다. 그리고 죽기 전날 밤, 그는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삐걱, 소리를 내면서.

    문 앞에 여인이 서 있었다. 소복이 아니라, 봄빛 옷을 입고 있었다. 살구꽃 같은 색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아니오. 겨우 한 철이었소."

    "거짓말하시네요. 여기 사십 년이 흘렀습니다."

    한생은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그 손이 차갑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오. 연이."

    "네. 선비님."

    두 사람은 마루 끝에 나란히 앉았다. 창밖에는 살구나무가 가득했다. 밤인데도 마당이 밝았다. 그리고 그 밝은 마당에는, 이 집에 들렀다가 간 모든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비 내리는 밤에 문을 열어 준 선비와, 이름 하나를 기다린 처녀 귀신의 이야기. 출처는 천예록(天倪錄)에 실린 야담입니다. 무서운 귀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잊어버린 이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다음 화에서 또 어떤 이름이 되찾아질지, 구독과 좋아요와 알림 설정으로 함께해 주세요.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