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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고름을 푼 조선 제일의 명기, 그녀의 품에 안긴 가난한 선비가 정승이 된 사연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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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비단은 몸을 덮을 뿐, 사람의 속까지 귀하게 하진 못하지요." 평양 제일의 콧대 높은 명기가 한겨울 쓰러진 누더기 선비의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봤다! 전 재산과 속량 문서가 숨겨진 '붉은 옷고름'을 풀어 선비의 뒷바라지를 자처한 기생 매향. 부패한 양반들의 모함으로 옥살이까지 하게 되지만... 과연 누더기 선비는 장원급제하여 그녀를 정경부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신분을 뛰어넘은 두 사람의 통쾌한 사이다 역전극이 지금 시작됩니다!
[단계 1]
대동강 물안개가 평양성의 기와지붕을 무겁게 삼키던 초겨울 밤이었다. 연광정 아래로는 붉은 등불을 밝힌 기방의 배들이 미끄러지듯 유유히 떠다녔고, 흥겨운 장구와 애절한 거문고 소리가 얼어붙은 강물 위를 처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평양에서 가장 이름난 기방인 청월관의 안채에는 최고급 비단옷을 차려입은 한량들과 권세가의 자제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의 끈적한 시선과 관심은 오직 단 한 사람, 평양 제일의 명기라 불리는 매향에게 쏠려 있었다. 매향은 시와 노래에 능할 뿐만 아니라 그 미모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빼어났으나, 아무리 많은 재물을 내미는 사내 앞에서도 쉽사리 마음을 열거나 웃음을 흘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머리에는 황금으로 세공된 화려한 장식의 비녀가 꽂혀 있었고, 가슴팍에는 귀한 진주 노리개가 흔들렸지만, 그녀의 표정은 한겨울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다.
"비단은 그저 사람의 겉몸을 덮을 뿐, 사람의 속내까지 귀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법이지요."
평양 부사의 조카 조태관이 거드름을 피우며 최고급 비단 열 필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내놓으며 하룻밤 술시중을 청했을 때도, 매향은 그저 서늘한 눈빛으로 술잔만 채워 주고는 냉정하게 물러났다. 조태관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붉게 달아올랐으나, 좌중에서는 감히 그를 비웃거나 소리 내어 웃는 이가 없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잔치가 무르익어 갈 무렵, 청월관 뒷문 밖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었다. 휘몰아치는 눈발 속에 낡고 해진 도포를 입은 젊은 선비 하나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흘 밤낮을 굶은 채 평양 감영에서 빌린 책을 돌려주러 눈길을 헤치고 오다가 그만 기력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 하인들은 재수 없는 거렁뱅이가 잔칫날에 찾아왔다며 몽둥이를 들고 그를 매몰차게 내쫓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누각 위에서 내려다보던 매향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선비의 옷은 군데군데 기워져 누더기나 다름없었고, 짚신은 찢겨 발바닥의 피로 붉게 젖어 있었지만,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와중에도 품속에 품은 책만큼은 눈송이에 젖지 않게 필사적으로 감싸 안고 있었다. 매향은 쥐고 있던 값비싼 옥 술잔을 망설임 없이 내려놓고, 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잰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그분을 당장 안으로 모시세요. 오늘 밤 제가 애타게 기다리던 가장 귀한 손님은 바로 저분이시니까요."
비단을 두른 오만한 사내들이 화려한 술상을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짐승처럼 끌려 나가던 가장 초라한 선비 한 사람이 매향의 호위를 받으며 모두의 경악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청월관의 높은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단계 2] 비단 속의 사람, 누더기 속의 그릇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하게 정신을 되찾은 선비는 자신이 한기가 도는 길바닥이 아닌 절절 끓는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싼 화려한 병풍과 비단 요에 당황한 그는 자신을 윤서진이라 밝히며, 이 귀한 은혜를 갚을 돈이 한 푼도 없으니 당장 마당으로 나가 장작이라도 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먼저 굶주린 배부터 채우시지요. 장작을 패는 것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매향은 다급한 그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잣죽 한 그릇을 조용히 밀어 놓았다. 서진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숟가락을 들기 전 죽 한 그릇을 정확히 반으로 덜어 문밖에서 떨고 있던 늙은 걸인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매향은 방 한구석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그 기묘하고도 고결한 모습을 깊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때, 누더기를 걸친 선비가 청월관의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것이 못내 뼈아프게 못마땅했던 조태관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은전 한 닢을 바닥에 툭 던졌다.
"네놈이 진정 글줄이나 읽은 선비라면, 내 가죽신에 묻은 더러운 눈이나 혓바닥으로 닦아 보거라. 그리하면 네놈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갈 노자쯤은 두둑이 마련해 줄 터이니."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서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천천히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은전을 주워 들고는, 조태관의 술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재물이 없어 고개를 숙일 수는 있으나, 재물 때문에 선비의 뜻을 팔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소인은 단지 가난할 뿐, 주인이 던져주는 고기뼈를 탐하며 발을 핥는 개는 아닙니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조태관이 서진의 뺨을 치려 손을 번쩍 치켜든 순간, 매향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몸짓으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그녀는 서진의 넓고 반듯한 이마와 굶주림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눈, 그리고 곧게 뻗은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비단옷을 입은 이를 귀하다 하고 누더기를 입은 이를 천하다 하지요. 하지만 옷은 하루 만에 바꿀 수 있어도 사람의 그릇은 평생을 다듬어야 하는 법.'
얼굴은 형편없이 야위었지만 눈동자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모욕을 당하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는 결코 지나치게 높아지거나 천박해지지 않았다. 매향은 그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방 안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하게 말했다.
"지금 선비님을 비웃은 분들은, 훗날 이 선비님께서 조정의 굳건한 기둥이 되어 높은 자리에 오르시는 날, 오늘 함부로 뱉어낸 그 웃음값을 뼈저리게 치르게 될 것입니다."
서진조차 그 말을 믿기 어렵다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매향의 눈동자는 누더기 너머에 숨겨진 서진의 거대한 가능성을 이미 확신하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계 3] 설정 — 이름은 높으나 마음은 빈 여인
매향은 평양성 내에서 가장 몸값이 비싸고 도도한 기생이었으나, 정작 본래 자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관아에 속한 늙은 기생 설죽의 거친 손에서 매를 맞으며 자라난 그녀는 억지로 글과 거문고, 요염한 춤과 깐깐한 예법을 뼛속 깊이 익혀야 했다.
'사내들이란 꽃을 사랑한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면서도, 막상 그 꽃이 시들어버리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무참히 짓밟고 버리는 족속들이다. 절대 그들에게 진심을 내어주어서는 아니 된다.'
설죽의 뼈 있는 가르침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은 매향은 그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온전히 내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화려한 방 안에는 뭇 사내들이 바친 은전이 가득 든 궤짝과 최고급 비단옷이 산더미처럼 넘쳐났지만, 새벽녘 요란했던 잔치가 끝이 나고 붉은 등불이 하나둘 꺼지면, 텅 빈 넓은 방에는 줄 끊어진 거문고의 처량한 여운과 뼛속까지 스며드는 지독한 외로움만이 남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권세가의 첩으로 들어가 안락하게 남은 생을 연명하는 짐승 같은 삶이 아니었다. 자신을 노리개인 기생이 아니라 온전한 한 명의 '사람'으로 바라봐 주고, 뜻을 함께 나눌 진정한 벗을 만나는 것이었다.
반면, 윤서진은 황해도 깊은 산골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어머니마저 여의고, 약값과 장례비를 마련하려 마지막 남은 한 뙈기 밭마저 팔아넘긴 철저히 몰락한 선비였다. 글재주는 신동이라 불릴 만큼 뛰어났으나 읽을 책을 살 돈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노자도 없었다.
청월관에 머물며 몸을 추스른 사흘 동안, 서진은 매향이 정성껏 마련해 준 값비싼 비단 도포를 끝내 거절하고, 촛불 아래서 자신의 낡은 누더기 옷을 묵묵히 꿰매 입었다.
"이 귀한 약값과 밥값은 훗날 제가 반드시 갚을 터이니 장부에 똑똑히 적어 두십시오."
매향은 그 답답할 정도로 올곧은 고집이 야속하면서도, 이상하게 자꾸만 마음이 끌렸다. 어느 깊은 밤, 매향이 그에게 학문이란 그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사다리일 뿐이냐 묻자 서진의 눈빛이 슬프게 가라앉았다.
"굶어 죽은 앙상한 백성의 시신이, 관아의 세곡 장부에는 쌀을 낼 수 있는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적혀 수탈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내 언젠가 벼슬을 얻는다면, 종이 위의 백성과 땅 위에서 피눈물 흘리는 백성을 기필코 같게 만들고 싶을 뿐이오."
그 대답은 매향의 굳게 닫혀 있던 가슴속 깊은 곳을 거세게 흔들었다. 그날부터 매향은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적막이 내려앉은 깊은 밤마다 서진과 마주 앉아 촛불을 밝히고, 경서의 참된 뜻과 고통받는 백성의 삶에 대해 밤이 새도록 논했다. 신분도, 살아온 길도 달랐지만 세상이 억지로 정해 놓은 좁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만은 두 사람 모두 같았기에, 그들은 서로의 영혼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단계 4] 사건 발생 — 한 편의 시가 불러온 모욕
평양 감사가 새로 부임하는 날, 청월관에서는 그를 환영하기 위한 전례 없이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안달이 난 조태관은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서진을 짓밟고 매향의 콧대를 완전히 꺾어놓겠다 다짐했다. 그는 평양에서 내로라하는 이름난 선비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고는 즉석에서 시재를 겨루게 만들었다.
"장원을 차지하는 자에게는 이 최고급 비단과 은 백 냥을 내릴 것이나, 꼴찌를 하는 놈은 여인네들처럼 술상을 머리에 이고 뜰을 엉금엉금 기어 돌게 할 것이다!"
윤서진은 그런 천박한 구경거리에 낄 마음이 추호도 없었으나, 조태관은 매향이 극찬한 대단한 인재의 실력을 감사가 직접 보셔야 한다며 강제로 억센 하인들을 시켜 그를 끌어냈다. 화려한 도포 자락을 뽐내던 선비들은 서진의 해진 소매와 초라한 꼴을 보며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터뜨렸다.
감사가 내린 시제는 '눈 덮인 대동강'이었다. 대부분의 응시자들은 강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찬양하거나 새로 부임한 감사의 높고 넓은 덕을 아부하는 간신배 같은 글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서진의 붓끝에서 흘러나온 시는 달랐다. 그는 꽁꽁 얼어붙은 나루터에서 과도한 세곡을 억지로 나르다 등창이 터져 죽어간 늙은 뱃사공과, 그 옆에서 언 땅을 파먹으며 굶주리는 앙상한 아이들의 참상을 피 끓는 문장으로 담아내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던 감사의 미간이 흉하게 일그러졌고, 눈치를 살피던 조태관은 당장 서진의 답지를 거칠게 빼앗아 북북 찢어 허공에 던져버렸다.
"천하디천한 주제에 잔칫날 관가를 감히 꾸짖고 능멸하려 들다니! 네놈을 당장 끌어내 곤장으로 뼈를 부러뜨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서진이 "백성의 피눈물을 숨기고 아부하는 글이야말로 임금을 속이는 대역죄"라고 굽히지 않고 맞서자, 험악한 분위기 속에 하인들이 그를 포박하려 달려들었다.
그때, 화려한 치맛자락을 끌며 매향이 연회장 한가운데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바닥에 처참하게 찢겨 흩어진 종잇조각들을 고운 손으로 하나하나 주워 모았다. 그리고는 조각을 맞춰가며 서진이 쓴 참혹하고도 시린 시를 맑고 구슬픈 음색의 노래로 부르기 시작했다. 흥청거리던 화려한 연회장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휩싸였고, 술을 따르던 어린 기생들과 바닥을 기던 하인들마저 그 처절한 가사에 남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노래를 마친 매향은 자신의 머리에서 번쩍이는 금비녀를 뽑아 술상 위에 단호히 내려놓았다.
"선비님의 시가 진정 죄가 된다면, 제 목숨과도 같은 이 비녀로 그 죗값을 대신 치르겠습니다."
조태관은 천한 기생년이 감히 양반을 능멸한다며 매향을 기방에서 내쫓아 관비로 보내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고, 서진이 기생을 홀려 재물을 뜯어내려 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삽시간에 퍼뜨렸다. 단 하룻밤 사이에 서진은 평양의 몹쓸 사기꾼으로 전락했고, 매향의 방에는 예약된 손님들의 싸늘한 취소 전갈만이 수북이 쌓여갔다. 서진은 자신 때문에 매향이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떠나려 했지만, 매향은 찢어진 시를 품속에 꼭 끌어안은 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단 한 편의 시가, 평온했던 두 사람의 삶을 되돌릴 수 없는 거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단계 5] 고민 — 옷고름에 걸린 두 사람의 운명
새벽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 서진은 낡은 책보를 등에 단단히 동여매고 도망치듯 청월관을 빠져나가려 했다. 자신이 곁에 머물면 매향이 평생 쌓아 올린 명성과 생계가 산산조각 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가 품은 허황된 뜻은, 결국 이토록 선하고 고운 사람마저 굶주리고 핍박받게 만들 뿐이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첩첩산중으로 숨어 들어가 더벅머리 아이들이나 가르치며 쥐죽은 듯 살겠소."
매향은 차마 그를 붙잡지 못한 채, 밤새 차갑게 마당에 쌓여가는 눈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늙은 기생 설죽은 그런 매향의 등짝을 후려치며 독살스럽게 타일렀다. 기생이 선비에게 알량한 진심을 주어봤자 훗날 남는 것은 짓밟혀 버림받은 상처와 감당 못 할 빚뿐이라고. 서진이 운 좋아 급제한다 한들 양반 가문에서 앞다투어 혼처가 쏟아질 것이며, 천한 관기 출신을 정실로 맞는 미친 사내는 이 조선 땅에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조태관은 사람을 보내 서진과 당장 인연을 끊고 그를 내치면 잃어버린 지위와 재물을 모조리 되찾아 주겠다는 달콤한 타협안을 제시해 온 터였다.
매향은 방 안 구석에 놓인 무거운 은전 궤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랫동안 숨죽여 망설였다. 이 궤짝 안의 재물은 사내들의 더러운 희롱과 멸시를 뼈 깎는 고통으로 견디며 모아 온 그녀의 피와 살이었다. 늙고 병들었을 때 누구에게도 비참하게 버림받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줄 마지막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손에는 서진이 썼던, 찢어졌다가 밥풀로 조심스레 다시 붙인 시 한 편이 쥐어져 있었다. 매향은 세상의 비웃음이나 서진의 관상보다, 비바람을 맞고 선 그 낡은 종이에 꾹꾹 눌러 담긴 사내의 뜨거운 진심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대동문 밖까지 미친 듯이 달려가 짐을 짊어지고 떠나는 서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양까지 무사히 당도할 노자와 책값이 든 주머니를 불쑥 내밀었다. 서진이 화들짝 놀라며 절대 받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어 돌아서자, 매향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붙였다.
"이것은 적선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훗날 선비님께서 높은 자리에 올라 백성을 저버린다면, 제가 끝까지 쫓아가 원금은 물론이요 그 이자까지 뼈를 깎아서라도 모두 받아낼 것입니다!"
그래도 서진이 차마 주머니를 받지 못하고 서성거리자, 매향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붉은 저고리의 옷고름을 천천히, 그리고 결연하게 풀기 시작했다. 서진이 당황하여 눈을 피하려 했으나, 그녀가 옷을 벗어 드러낸 것은 여인의 살결이 아니었다. 옷고름 안쪽 가장 은밀하고 안전한 곳에 겹겹이 꿰매어 숨겨 두었던 낡은 면천 문서와 전답 문서가 바스락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수십 년간 뼈가 부서져라 모은 돈으로 끔찍한 기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양인의 신분을 얻을 길을 홀로 처절하게 준비해 왔던 것이다. 그것마저 내어주면 그녀는 평생 이 지옥 같은 기방을 벗어날 희망을 잃게 될 터였다.
"제 운명을 지키려고 이 악물고 모은 목숨 같은 재물입니다. 이제 그 운명을... 선비님과 함께 걸어 보려 합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맹세해 주십시오. 훗날 그토록 바라던 높은 자리에 오르시더라도, 오늘 이 차가운 눈밭에서 덜덜 떨며 서 있던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 처절하고도 숭고한 고백 앞에, 서진은 끝내 오열하며 돈 대신 차갑게 얼어붙은 매향의 두 손을 으스러져라 꽉 부여잡았다. 내리는 눈송이 아래, 두 사람은 서로의 끔찍한 신분과 찢어지는 가난,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세상의 모진 비난까지 모두 함께 견뎌내기로 굳게 맹세했다. 날이 밝자 매향은 주저 없이 가장 값비싼 패물을 내다 팔았고, 서진은 평생 처음으로 깨끗한 새 책과 온기를 품은 따뜻한 도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단계 6] 새로운 세계 — 비단을 팔아 마련한 붓 한 자루
이튿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매향은 청월관으로 돌아가 자신이 평생 가장 아끼고 아껴두었던 금비녀와 진주 노리개, 그리고 화려한 패물들을 모조리 꺼내어 보따리에 쌌다. 평양의 거상들은 이미 조태관의 매서운 눈치를 살피며 제값을 쳐주려 하지 않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매향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노래 한 곡에 은전을 물 쓰듯 뿌려대던 사내들도, 그녀가 가진 패물에 미세한 흠집이 있다느니 세공이 낡았다느니 온갖 핑계를 대며 비열하게 값을 깎아내렸다. 매향은 그들의 얄팍하고 추악한 속셈을 훤히 꿰뚫어 보면서도 구차하게 흥정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청월관에서 행수 노릇을 하며 받았던 자신의 몫과 평생 모아 둔 은전까지 남김없이 내어, 관기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는 데 필요한 속량 절차를 밟았다.
관아의 늙은 아전은 속량 문서에 붉은 관인을 쿵 찍어 내어 주면서도,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쯧쯧, 기생년의 천한 팔자가 고작 이깟 얇은 종이 한 장으로 하루아침에 양반네처럼 달라질 것 같으냐?" 매향은 그 모욕적인 언사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문서를 품속 깊이 갈무리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깟 종이 한 장이 때로는 사람을 살려 높은 벼슬아치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목을 매달아 죽이는 대역 죄인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 어찌 제 비루한 삶 하나 바꾸지 못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늙은 기생 설죽은 먼 길을 떠나는 매향의 손에 자신이 아끼던 낡은 거문고 하나를 쥐여주며, 훗날 뼈저리게 후회하며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청월관의 굳게 닫힌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며 모질게 경고했다. 그러나 매향은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을 키워준 설죽을 향해 큰절을 세 번 올리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한양으로 향하는 멀고 험한 길, 윤서진은 매향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겠다며 봇짐을 진 채 걸으면서도 하루도 손에서 붓과 책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가 새는 가장 값싼 주막방을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했고, 매향은 글을 모르는 까막눈 행상들의 편지를 대신 읽어 주거나 기방에서 부르던 노래를 가르쳐주며 한 푼 두 푼 여비를 보탰다. 서진 역시 양반의 체면을 버리고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거나 서당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푼돈을 벌었고, 모두가 잠든 새벽과 깊은 밤에만 책상머리에 앉아 피를 토하듯 공부에 매진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한양 도성에 발을 들였을 때, 그들의 수중에 남은 것이라곤 은전 단 몇 닢과 다 해진 책 세 권, 그리고 매향의 목숨과도 같은 속량 문서 한 장뿐이었다. 매향은 남대문 밖,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의 허름한 초가를 빌려 탁자 몇 개를 놓고 뚝배기에 국밥과 막걸리를 파는 작은 주막을 열었다.
평양 제일의 명기가 주막을 열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자, 그녀의 고운 자태와 노래를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호기심에 이끌린 한양의 양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매향은 그들의 천박한 술상 앞에서 아양을 떨며 노래하는 대신, 콧대 높은 유생들의 허세와 위선을 매섭게 꼬집으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하루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공자왈 맹자왈 어려운 글귀를 떠벌리던 젊은 유생이 정작 국밥과 술값 계산을 틀리자, 매향은 쯧쯧 혀를 차며 탁자 위로 주판을 요란하게 튕겼다.
"입으로는 천하를 다스리는 성현의 깊은 뜻을 줄줄 읊으시면서, 정작 백성들이 피땀 흘려 거둔 콩 한 되의 값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시니, 훗날 벼슬길에 올라 나라의 녹을 먹게 되시면 어찌 눈먼 백성들의 세금을 바르게 헤아리시겠습니까?"
그녀의 뼈 있는 농담에 주막 안은 짐꾼들과 장사꾼들의 통쾌한 웃음바다로 변했고, 잘난 체하던 유생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렇게 매향의 주막은 점차 가난하고 힘없는 선비와 장사꾼, 천대받는 짐꾼들이 신분의 벽을 허물고 한데 모여 세상의 부조리를 한탄하고 토론하는 해방구가 되어갔다. 서진은 매일 밤 주막 한구석에 앉아, 낡은 경전 속에는 결코 적혀 있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백성들의 절박한 사정과 한숨을 온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단계 7] 두 번째 이야기 — 글 밖에서 찾은 정답
처음 주막 문을 열었을 때, 윤서진은 아내 매향이 술기운에 취한 천한 짐꾼들이나 무지렁이 장사꾼들의 신세 한탄을 자신의 과거 공부보다 중하게 여기며 귀 기울이는 모습이 내심 못마땅했다. 당장 다가오는 소과 시험을 앞두고 사서삼경의 경전 한 줄이라도 더 머릿속에 욱여넣어야 할 피 같은 시간에, 왁자지껄한 주막의 소음은 학문에 방해만 될 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매향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귀를 틀어막고 책만 파고드는 서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느 날 아침 다짜고짜 그의 책을 덮어버리며 단 하루만 자신을 묵묵히 따라다녀 보라고 이끌었다. 어리둥절한 서진을 이끌고 매향이 처음 향한 곳은 동 트는 새벽의 난전 시장이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며칠째 폭등하는 쌀값 때문에 아이들 먹일 피죽조차 쑤지 못해 눈물짓는 남루한 아낙의 절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다. 발길을 돌려 마포 나루터로 가자, 탐관오리들에게 터무니없는 군포를 내지 못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누런 소를 강제로 빼앗기고 강물에 몸을 던지려 통곡하는 늙은 농부의 억울한 사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번화한 종로 거리 한복판에서는, 최고급 비단옷을 쫙 빼입은 고관대작의 하인이 가난한 포목점 상인에게 나라의 법도와 양반의 체면을 들먹이며 억지로 외상 물건을 강탈해가듯 쓸어가는 파렴치한 광경마저 벌어지고 있었다. 처참한 현실을 차례로 마주하고 주막으로 돌아오는 길,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매향이 나직이 물었다.
"선비님, 오늘 하루 도성을 돌며 보신 백성들의 참혹한 모습들 가운데, 선비님께서 그토록 밤낮으로 파고드시던 경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 단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서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부끄럽소. 그 모든 비극이 이미 성현의 경전에 나라가 망하는 징조라 적혀 있었거늘, 나는 그저 눈먼 장님처럼 검은 글자만 외울 뿐, 그 속에서 피 흘리는 진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었소."
그날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치열한 공부 방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서진이 밤을 새워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와 백성을 구휼할 대책을 글로 써 내려가면, 매향은 장사꾼의 약삭빠른 시선과 힘없는 백성의 처지에서 그 논리의 허점들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서진이 '흉년에는 국가 창고의 곡식을 무상으로 푼다'는 대책을 내놓으면, 매향은 "가진 자들이 창고 장부를 조작해 중간에서 가로채면 어찌할 것입니까? 감시할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반문했다. 서진이 '과도한 세금을 법으로 줄이겠다'고 적으면, 매향은 "법으로 줄인들 탐욕스러운 아전들이 교묘한 명목을 붙여 뒷돈으로 다시 거두어들일 텐데, 그 막힌 숨통은 어찌 뚫어줄 것입니까?"라며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다.
서진은 매향의 예리한 질문에 매번 말문이 턱턱 막혀 식은땀을 흘렸지만, 결코 화를 내거나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묵묵히 붓을 들어 답안을 고치고 또 고쳐 썼다. 매향 또한 틈틈이 서진의 어깨너머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과 복잡한 역사서를 배우며, 자신이 가진 속량 문서가 어떤 법적 절차를 거쳐야 훗날 권세가들의 공격 앞에서도 온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치밀하게 익혀 나갔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불쌍히 여겨 구제해 준 은인이나 평생의 빚을 진 채무자가 아니라,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완벽하게 채워주는 세상 둘도 없는 지기이자 벗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깊은 밤, 빗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던 서진이 문득 붓을 내려놓고 불안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만약 내가 이번 과거에서도 낙방하여 평생을 늙은 서생으로 썩는다면... 그대가 나를 위해 쏟아부은 그 귀한 재물과 청춘을 평생 갚지 못할까 그것이 사무치게 두렵소."
그러자 매향은 서진의 거칠어진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의 낙방이 아닙니다. 과거에 떨어져 좌절한 선비 윤서진은 제가 옆에서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권세와 탐욕에 취해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마음이 죽어버린 껍데기 관리가 된다면... 그때는 저조차도 당신을 영영 살려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뼈저린 감동을 받은 서진은 즉시 화선지를 꺼내어 자신의 이름 옆에 나란히 매향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평생 가슴에 새길 단 하나의 굳은 약속을 먹물로 진하게 남겼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를수록, 가장 낮은 곳에서 우는 백성의 목소리를 먼저 들을 것.'
매향은 그 약속이 적힌 종이를 흔들리는 등잔불 옆 벽면에 소중하게 붙여두었다. 천하디천한 누더기 선비와 기생 출신의 천기가 감히 세상을 논하고 정치를 왈가왈부한다는 소문이 조롱 섞인 비웃음과 함께 도성 내에 파다하게 퍼졌지만, 이상하게도 매향의 주막을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얻고 가는 사람들의 발길은 날이 갈수록 끊임없이 늘어만 갔다.
[단계 8] 약속의 결실 — 장원보다 먼저 얻은 이름
마침내 관리로 나아가는 첫 관문인 소과를 치르는 날이 밝았다. 시험장이 차려진 과장 앞은 동이 트기도 전 새벽부터 벼슬자리를 탐내는 전국의 유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화려한 비단 도포를 걸치고 최고급 족제비 털로 만든 붓과 명나라산 벼루를 자랑스레 꺼내놓는 부잣집 자제들 사이에서, 윤서진이 가진 것이라곤 매향이 자신의 헌 베옷을 밤새 정성껏 뜯어 지어준 투박한 책보와 시장통에서 산 평범하고 몽당한 붓 한 자루가 전부였다.
평양에서 올라온 조태관 역시 한양의 권세 있는 친척 집 안방을 차지하고 머물며 이번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과장에서 서진의 초라한 행색을 발견하자마자 주변의 유생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큰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저놈이 바로 평양 기생년의 치마폭에 싸여, 년이 몸을 팔아 번 더러운 술값으로 여기까지 과거를 보러 기어 올라온 파렴치한 자라오!" 주변에서 모멸찬 비웃음이 쏟아졌지만, 서진은 그의 도발에 일언반구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붓을 다듬으며 시험장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징이 울리고 내걸린 시제는 '극심한 흉년이 든 고을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면서도, 동시에 나라의 비어가는 창고를 안전하게 지키는 방도'를 묻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수많은 응시자들이 성현의 화려한 문장과 막연한 도덕적 도리만을 인용하여 답안지를 채워 내려갈 때, 서진은 매향과 함께 주막에서 국밥을 푸며 짐꾼과 장사꾼들에게 직접 전해 들었던 생생한 현실의 문제들을 떠올렸다.
그는 단순히 관아의 곡식을 푸는 임시방편만으로는 결코 굶어 죽어가는 백성을 살릴 수 없다고 꼬집었다. 나아가 횡령을 막기 위해서는 고을별 실제 호구 조사 기록과 창고의 출납 장부를 마을 한가운데 방에 붙여 공개하고, 까막눈 백성이라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제도를 당장 마련해야 한다고 논리정연하게 써 내려갔다. 답안의 마지막에는 '문턱 높은 관아를 굶주린 백성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녹을 먹는 관리가 직접 곡식을 짊어지고 가장 가파른 마을로 내려가 구휼해야 한다'는 서리서리 맺힌 대목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시험이 끝난 날 저녁, 조태관은 자신의 유력한 친척이 시험관과 은밀히 선이 닿아 있다며 벌써 급제라도 한 사람처럼 기생들을 부르고 밤새도록 요란한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며칠 뒤, 합격자를 알리는 방이 궐문 앞에 나붙던 날, 놀랍게도 가장 높은 자리인 장원 급제자의 칸에는 '윤서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당당하고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장원 소식이 전해지자 주막의 가난한 손님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서진을 목말 태워 온 동네를 돌려 했고, 매향은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면서도 일부러 제일 먼저 서진이 그동안 외상으로 빌려 간 쌀과 종잇값이 빼곡히 적힌 낡은 장부를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자, 이제 당당히 장원이 되셨으니, 저에게 지신 이 엄청난 빚부터 이자를 쳐서 서둘러 갚으셔야지요."
그녀의 당돌한 농담에 모두가 박장대소했고, 무뚝뚝하기만 하던 서진도 한양에 온 이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파안대소했다. 그러나 축하연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 서진은 가장 먼저 도성의 관청을 찾아갔다. 그는 매향의 속량 문서가 법적으로 완벽한지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하고, 그녀의 이름을 온전한 양인의 호적에 올리는 수속을 서둘러 진행했다.
호적을 관리하던 아전은 장원 급제하여 탄탄대로를 달릴 젊은 선비가, 굳이 천한 기생 출신 여인과 정식으로 얽혀 족보를 망쳤다는 소문이 나면 벼슬길이 막힌다며 은근슬쩍 만류했다. 하지만 서진은 붓을 빼앗아 들고 자신의 이름을 매향의 보증인 자리에 주저 없이 굵게 적어 넣었다.
이어 주막으로 돌아온 서진은 가난한 이웃들과 주막을 찾던 허름한 동료 유생들 앞에서, 자신을 먹여 살린 매향을 첩이나 숨겨둔 은인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 늙어갈 단 하나의 정실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만천하에 선언했다. 화려한 예식도, 비단옷도 없는 초라한 주막 마당에서 매향은 설죽에게 받아온 낡은 거문고를 상 위에 올려놓고 서진과 맞절을 올렸다. 신분 높은 하객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 소박하고도 눈물겨운 혼례식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세상이 억지로 부여한 거짓된 이름이 아닌, 서로에게 바치는 가장 온전하고 귀한 진실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단계 9] 중간 전환 — 급제의 꽃 아래 숨은 칼
소과 장원이라는 눈부신 성취에도 윤서진은 결코 자만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벼슬길의 진정한 등용문인 문과(대과)를 치르기 위해 더욱 지독하게 학문에 매달렸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누더기 선비가 기생의 내조로 소과 장원에 올랐다는 극적인 소문이 한양 도성 유생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지자, 예전에는 벌레 보듯 거들떠보지도 않던 콧대 높은 양반가에서 앞다투어 귀한 비단책과 최고급 먹을 선물로 보내오며 노골적으로 연줄을 대려 안달이었다. 심지어 세력이 막강한 어떤 뼈대 있는 집안에서는, 정실인 조강지처를 첩으로 내치고 자기 가문의 여식과 새로 혼인한다면 평생 과거 공부와 벼슬길에 필요한 거대한 전답과 기와집을 내어주겠다는 은밀하고 비열한 제안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서진은 "내게는 이미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내가 있소"라며 그 모든 유혹과 뇌물을 단칼에 거절하고 문전박대했다. 서진의 대쪽 같은 거절에 앙심을 품은 양반들은 그 화살을 일제히 매향에게 돌려 그녀가 기생 출신이라는 사실을 악랄한 조롱의 재료로 삼기 시작했다. 유생들은 서진이 천한 기생년의 요사스러운 치맛바람과 재물로 운 좋게 얻어걸린 요행수 급제일 뿐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고 수군거렸고, 늦은 밤이면 주막의 흙벽에 서진과 매향을 짐승에 비유하여 모욕하는 추잡한 춘화와 방이 흉측하게 나붙기도 했다.
매향은 아침마다 벽에 붙은 그림을 뜯어내며 태연하게 웃어넘겼으나, 비가 오거나 궂은 날 손님이 없어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을 때면 '나라는 존재의 뿌리가 결국 저 맑고 고운 사람의 날개를 꺾고 앞길을 막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지독한 자괴감에 빠져 가슴을 쳤다. 서진은 아내의 짓눌린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고 있었기에, 대과 답안을 준비할 때마다 두 사람이 함께 촛불 아래 세웠던 '가장 높은 곳에 오를수록 낮은 곳의 목소리를 먼저 들을 것'이라는 벽의 약속을 수없이 되뇌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마침내 문과 대과의 마지막 관문, 임금이 친히 주관하여 순위를 매기는 전시(殿試)의 날이 밝았다. 붉은 일월오봉도 아래 앉은 어전에서 내려진 시제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지방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을 방도'였다. 수많은 유생들이 목민관 스스로 도덕적 청렴함을 길러야 한다는 공허하고 뻔한 공자 맹자의 말씀만을 나열할 때, 서진은 관리들의 선의에 기대는 것은 허상이라 일축했다. 대신, 억울함을 당한 지방 백성들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직접 조정에 비리를 고발할 수 있는 새로운 직통로를 개설해야 하며, 고을 수령의 호구 장부와 암행어사의 장부를 교차 검증하여 단 한 톨의 횡령도 엄벌에 처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제도를 거침없이 주장했다. 그의 문장은 비단결처럼 유려하지는 않았으나, 마치 고단한 고을 백성들의 피눈물 나는 사정을 바로 눈앞에 펼쳐놓은 듯 절박하고 생생했다.
결과가 발표되자, 임금은 서진의 탁월한 식견과 실무적 통찰력에 감탄하며 그를 대과 장원으로 발탁했다. 어전에 불려 나간 서진에게 임금이 훌륭한 학문을 가르친 뛰어난 스승이 누구냐 묻자, 서진은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이름난 학자의 이름 대신 아내 '매향'의 이름을 가장 먼저 입에 올렸다. "신이 죽은 글자 속의 백성을 피가 흐르고 숨 쉬는 진짜 사람으로 보게끔 눈을 띄워 준 이는, 척박한 땅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신의 천한 아내 매향이옵니다."
그 전대미문의 파격적인 고백은 단 하루 만에 도성 안팎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가난하고 억눌린 촌부와 백성들은 천기 출신 아내의 지혜를 임금 앞에서 당당히 인정한 서진을 영웅이라 칭송하며 환호했으나,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고관대작들은 신성한 어전에서 기생년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하여 조정의 체면을 더럽혔다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 소식이 평양성에 머물던 조태관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그는 질투와 분노로 술상을 엎어버리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한때 자신이 발밑의 벌레처럼 짓밟고 조롱하려 했던 누더기 선비가 당당히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자신이 탐냈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한 매향이 장원의 정실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살의와 두려움 속에 조태관은 평양 청월관을 드나들던 타락한 옛 아전에게 거금을 집어주며 매향의 속량 기록을 모조리 뒤져 흠집을 찾아내라 지시했다.
며칠 뒤, 붉은 관인의 도장 자국이 기묘하게 흐릿하게 번져 있고, 서류상의 날짜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는 의심스러운 문서 한 장이 조태관의 손에 쥐어졌다. 그것이 진본인지, 아니면 돈을 먹인 아전이 조작해 낸 위조품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의심의 불씨만 던지면, 굶주린 이리 떼 같은 조정 대신들이 합세하여 서진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매향을 다시 노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서진의 장원 급제를 축하하는 붉은 등불이 주막 처마를 환하게 밝히며 기쁨이 넘실대던 그 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는 두 사람의 목숨과 운명을 산산이 찢어발길 날카롭고 서늘한 칼날이 소리 없이 뽑혀 나오고 있었다.
[단계 10] 위기의 압박 — 아내를 부정하면 벼슬을 지켜 주겠다
윤서진이 조정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첫 관직을 임명받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평화로운 오후, 별안간 살기등등한 형조의 군졸과 관리들이 거친 발걸음으로 주막을 겹겹이 에워싸고 들이닥쳤다. 당황한 주막 손님들이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형조 관리는 매향이 지닌 속량 문서가 교묘하게 위조된 것이라는 엄중한 고변이 들어왔다며 방 안을 난장판으로 뒤엎고는, 서랍에 있던 모든 서류와 주막의 영업 장부까지 모조리 압수해 갔다.
고변의 주동자는 다름 아닌 조태관이었다. 그는 평양 관아의 옛 관기 명부 기록을 결정적인 증거라며 내세웠는데, 그 낡은 명부에는 매향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채 여전히 관기로 똑똑히 등재되어 있었고, 속량을 허락했다는 당시 수령의 결재 수결 모양도 다른 관아 문서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논리였다. 이 주장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매향은 천한 관기의 신분으로 감히 양인 행세를 하며 도망친 중죄로 관비로 끌려가 평생을 참혹하게 살아야 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서진 역시 국가의 재산인 관기를 몰래 빼돌려 아내로 삼고, 이를 숨긴 채 과거에 응시한 자격 미달의 사기꾼으로 몰려 장원 급제가 취소되는 것은 물론 참형까지 면하기 어려운 끔찍한 상황이었다.
소문은 발 없는 말이 되어 도성 전체로 퍼져나갔고, 어제까지만 해도 서진의 통찰력을 칭찬하며 주막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젊은 유생들은 하루아침에 전염병 환자를 피하듯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앞다투어 혼처를 들이밀며 줄을 서려던 권세 있는 양반들은 안면을 싹 바꾸어, 형조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결백을 증명하려면 일단 저 천한 기생과의 혼인 자체를 강하게 부정하고 내치라고 충고했다. 급기야 평소 서진의 글재주를 아끼던 조정의 한 고위 대신은 그를 은밀히 불러 유혹했다.
"자네 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어찌 계집 하나 때문에 온 가문과 앞날을 진흙탕에 처박으려 하는가? 그 여인을 당분간 정실이 아닌 첩이라 한껏 낮추어 말하고 모든 죄를 씌워 평양으로 돌려보내게. 그리만 한다면 내가 힘을 써서 자네의 장원 급제 취소만은 막아주고, 청요직(淸要職) 관직도 온전히 지켜 주겠네."
그러나 서진은 핏발 선 눈으로 그 대신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단호히 일갈했다.
"대감마님, 제게 그 사람은 쓰다 버리는 '계집 하나'가 아닙니다. 제가 굶어 죽어갈 때 제 입에 밥을 물려준 어머니이며, 오만에 빠져 눈이 멀었을 때 진짜 백성의 글을 깨우쳐 준 유일한 스승이자 목숨 같은 아내입니다. 내 아내를 팔아 구걸한 벼슬자리라면 차라리 목을 매고 죽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그 타협 없는 오만한 대답이 조정에 전해지자, 권위적인 대신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거세져 형조를 향해 서진과 매향을 당장 하옥하라는 압박이 빗발쳤다.
형조로 끌려가 온몸이 찢기는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덮쳐오던 밤, 매향은 어두운 방 안에서 서진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선비님, 부디 저와의 인연을 끊으시고 홀로 살아남으십시오. 비록 세상이 우리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아 제가 억울하게 끌려간다 해도, 당신만은 저당 잡히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아 훌륭한 관리가 되어 백성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그래야만 제가 당신에게 바친 제 인생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 주막 벽에 붙여 두었던 '약속의 종이'를 떼어내어 그녀 앞에서 확 찢어버리려 했다. 매향이 기겁하며 손을 뻗어 그를 말리자, 서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찢는 대신 다시 고이 접어 자신의 갓 끈 안쪽 품속 깊이 소중하게 넣었다.
"이 작은 종이 하나에 적힌 약속, 내 아내 하나조차 지켜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얻는 벼슬이라면, 내 평생 백성을 굽어살피고 지키겠다는 그 잘난 다짐들 또한 모두 역겨운 거짓말일 뿐이오. 나는 당신과 함께 살거나, 당신과 함께 죽을 것이오."
이튿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매향은 군졸들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포승줄조차 묶이지 않은 당당한 걸음으로 홀로 형조 관아를 향해 걸어갔다. 주막거리의 이웃들은 길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서, 핍박받으면서도 고개 숙이지 않는 그녀의 꼿꼿한 뒷모습을 보며 숨죽여 눈물로 배웅했다.
조태관은 매향이 형장 위에 오르면 지레 겁을 먹고 제 입으로 문서 위조를 낱낱이 자백할 것이라 확신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형조 판서 앞에서의 첫 심문에서, 매향은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자신이 속량을 허락받던 날짜와 정확한 시각, 늙은 아전에게 거래비로 넘긴 패물의 세세한 종류, 그리고 그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평양 상인들의 실명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막힘없이 줄줄이 읊어댔다.
나아가 그녀는 조태관이 결정적 증거라며 내민 평양의 옛 관기 명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저 명부를 제 눈으로 직접 살피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당돌하게 요구했다. 비록 몇 발자국 떨어진 먼발치에서 스치듯 보았을 뿐이지만, 그녀의 예리한 눈썰미는 명부의 다른 이름들과 달리 유독 '매향'이라는 이름 석 자 주변의 먹빛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지나치게 새까맣고 윤기가 흐른다는 사실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제 매향은 단순한 수감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완전한 자유와 하나뿐인 남편의 벼슬을 지켜내기 위해, 평양 제일의 눈치 빠른 기생으로 수십 년간 사내들의 밑바닥을 상대하며 뼈저리게 익혀온 사람 보는 눈과 치밀한 기억력을 무기 삼아, 권력자들과의 피 튀기는 반격의 진검승부를 치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단계 11] 모든 것을 잃은 순간 — 지워진 도장과 사라진 증인
매향의 기세 등등하고 논리 정연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조태관이 미리 손을 써둔 형조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냉랭하고 편파적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줄 것이라 굳게 믿었던 증인들은 마치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속량 당시 매향의 비싼 패물을 사들였던 평양의 객주 상인은 조태관이 보낸 왈패들의 살해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야반도주하여 한양을 뜬 지 오래였고, 평양 관아에서 매향의 속량 문서 작성을 직접 담당했던 늙은 아전은 갑작스러운 병으로 급사했다는 석연치 않은 부고만이 전해졌다. 심지어 매향을 길러준 청월관의 행수 설죽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조태관은 이 모든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띠며 자신이 미리 매수해 둔 가짜 증인들을 줄줄이 내세웠다. 청월관에서 설죽 다음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젊은 기생은 형조 판서 앞에 엎드려, 매향이 본래부터 기방의 재물을 훔쳐 달아날 흉악한 마음을 품고 신분을 세탁하려 했다며 눈물까지 흘리며 거짓 증언을 늘어놓았다. 형조의 관리들은 조태관이 제출한 위조된 관기 명부에 버젓이 이름이 남아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매향의 모든 진술을 의심하고 묵살했다.
서진이 나서서 조태관이 제출한 명부의 먹빛이 유독 새롭고 종이의 결이 다르다고 피를 토하듯 주장했으나, 조태관 측에 매수된 관아의 서리는 낡고 오래된 장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덧쓴 것일 뿐이라며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갔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형조의 군졸들이 주막에서 압수해 온 매향의 속량 문서였다. 그 문서 한가운데 찍힌 붉은 관인은 언제 물에 젖었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하게 번져 있었다. 조태관은 저 흐릿하게 뭉개진 도장 자국이야말로 천한 기생년이 조잡하게 문서를 위조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며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높였다.
결국 매향은 최종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차갑고 습한 지하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서진 역시 신분이 불분명한 관기를 빼돌려 정실 아내로 삼고 국가를 기만한 중죄인으로 몰려 다잡은 첫 관직 임명이 무기한 보류되고 말았다.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날 깊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이 매향과 서진의 삶의 터전인 빈민촌 주막 창고에 시뻘건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매캐한 연기에 놀라 깬 서진과 이웃 짐꾼들이 혼비백산하여 우물물을 퍼 나르며 가까스로 불길을 잡았지만, 잿더미로 변해버린 주막 안에는 두 사람이 애지중지하던 서책들과 영업 장부들이 모조리 까맣게 타버린 뒤였다. 가장 뼈아픈 것은 두 사람이 희망을 품고 벽에 붙여 두었던 '가장 높은 곳에 오를수록 낮은 곳의 목소리를 먼저 듣겠다'는 약속의 종이마저 절반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 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날, 권세가들로부터 매향을 내치고 양반가 여식을 들이면 당장 역적 누명을 벗고 벼슬길을 열어 주겠다는 끈질긴 제안이 또다시 은밀하게 들어왔다. 서진이 이를 단칼에 거절하며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자, 이번에는 서진의 소과와 대과 답안마저 요물 같은 매향이 밤마다 대신 지어 주었다는 악의적인 헛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다. 한때 누더기 선비의 통쾌한 장원 급제를 제 일처럼 기뻐하며 응원하던 주막거리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흉흉한 소문에 흔들려 하나둘 등을 돌리는 자들이 생겨났고,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들은 불탄 주막의 문짝마저 떼어 가려 행패를 부렸다.
서진은 무너져 내린 잿더미 주막 한가운데 홀로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자신의 어설픈 정의감과 헛된 벼슬 욕심이 결국 매향의 피땀 어린 재물과 고귀한 자유를 모조리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닌지 뼈를 깎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짐승처럼 오열했다.
한편, 어둡고 축축한 옥에 갇힌 매향 역시 차가운 짚단 위에 웅크린 채 태어나 처음으로 숨이 멎을 듯한 끔찍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유죄가 확정되어 관기 명부에 다시 이름이 오르게 된다면, 그녀는 목에 칼을 찬 채 평양으로 질그질그 끌려가 평생 사내들의 노리개로 짓밟히며 관청의 더러운 명령을 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떨며 바닥을 주시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하나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형조 심문장에서 힐끗 보았던 자신의 압수된 속량 문서. 그 문서의 도장이 물에 번져 있었다는 사실이 묘한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매향은 옥살창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을 바라보며 번뜩이는 눈빛을 빛냈다. 형조 관리들이 주막 궤짝에서 빼앗아 간 그 문서는, 자신이 목숨과도 같이 여기며 간직해 온 '진짜 원본'이 아니었다. 평생을 기방의 암투 속에서 남의 비밀을 쥐고 살았던 매향은, 자신의 숨통을 쥘 가장 치명적이고 중요한 서류를 도둑질 당하기 쉬운 뻔한 궤짝 따위에 결코 허술하게 보관할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계 12] 어두운 밤 — 붉은 옷고름 속에 남은 희망
깊은 밤, 매향은 자신을 감시하던 나이 든 옥졸 여인에게 자신이 차고 있던 은비녀를 몰래 쥐여주며 남편 서진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옥졸의 묵인 아래 형장의 어두운 구석에서 몰래 이루어진 면회 시간. 파리하게 야윈 서진이 옥살창을 부여잡고 오열하자, 매향은 오히려 슬프도록 차분하고 체념한 듯한 텅 빈 얼굴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힘없이 입을 열었다.
"서방님, 첩이 정녕 하늘의 뜻을 어겨 평양의 천한 관기로 다시 끌려가게 된다면... 마지막 가는 길에 제가 어머니처럼 모시던 설죽 어미께 처음 받았던 '붉은 저고리'라도 꼭 한 번 입고 떠나고 싶사옵니다."
옆에서 엿듣고 있던 옥졸은 억울하게 끌려가는 여인의 흔한 신세 한탄이라 여기며 평범한 옷 한 벌쯤 반입하는 것은 눈감아 주겠노라며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그 순간, 서진의 흔들리던 동공이 벼락을 맞은 듯 크게 요동쳤다. 서진은 매향의 깊고 단단한 눈빛 속에서 그 말이 단순한 유언이 아닌, 목숨을 건 치명적인 암호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매향이 말한 그 '붉은 저고리'는, 그 옛날 대동문 밖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그녀가 서진을 붙잡고 직접 옷고름을 뜯어 숨겨진 속량 문서를 보여 주었던 바로 그 운명의 옷이었다. 한양으로 올라온 이후에도 매향은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여 진짜 속량 문서 원본은 다시 붉은 저고리의 옷고름 안쪽 가장 은밀한 솔기에 겹겹이 꿰매어 숨겨 두었고, 궤짝에는 만약을 위해 베껴 둔 등본(사본)만을 넣어두었던 것이다. 청월관에서 수많은 고관대작들의 추악한 비밀을 묵묵히 지켜 주며 살아남았던 그녀는, 자신의 목숨줄인 문서를 절대 한곳에 방치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이 도우셨는지, 주막에 끔찍한 방화가 일어났을 때 그 붉은 저고리는 잿더미 속에 있지 않았다. 마침 전날 매향이 주막의 허드렛일과 빨랫감을 품삯을 주고 맡아 주던 이웃 빈민촌 아낙의 집에 맡겨 두었기에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진은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가 아낙의 집에서 붉은 저고리를 찾아내 가슴에 품었다. 그러나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도 차마 칼로 옷고름을 뜯어내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문서를 먼저 꺼내 버린다면, 간교한 조태관이 형조의 군졸들을 매수하여 서진이 급조해 낸 위조품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물고 늘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매향은 면회 때 서진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적으며 당부했었다. 만인이 지켜보는 공개된 심문 자리에서, 형조의 최고 관리와 관아 의녀가 직접 이 옷고름의 실밥을 뜯어 확인하게 해야만 한 치의 의심도 사지 않는 완벽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진짜 원본 문서 단 한 장만으로는 간악한 조태관과 부패한 대신들의 결탁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 부족했다. 그들은 뻔뻔하게 원본의 붉은 도장마저 위조된 것이라 우겨댈 것이기 때문이다. 매향은 서진에게 평양 관아의 속량 문서는 반드시 '두 벌'로 작성되어 반으로 나누어진다는 중대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한 벌은 속량 당사자에게 주어지지만, 다른 한 벌은 관아의 내부 재정 장부 사이에 끼워 보관하는데, 이때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두 문서를 나란히 겹쳐 놓고 그 가장자리에 걸쳐서 하나의 관인을 찍는 이른바 '반절 관인(半切官印)'의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진본 두 장을 나란히 맞추는 순간, 반으로 갈라졌던 붉은 관인의 곡선과 찢어진 종이의 섬유 결이 완벽하게 하나로 이어져야만 진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조태관은 인사를 담당하는 기생 명부만 빼돌려 조작했을 뿐, 창고의 재화를 다루는 은밀한 재정 장부의 존재와 그 안의 속량 대금 납부 기록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서진은 즉시 평양으로 내려가 재정 장부를 찾아올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있는 장원 급제자가 움직인다면, 눈치 빠른 조태관의 살수들이 먼저 당도하여 평양 관아의 장부를 불태워 버릴 것이 명약관화했다. 서진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어둠 속에서 불탄 주막을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매향에게 글월을 배우고, 굶주려 쓰러지려 할 때 뜨거운 국밥을 공짜로 얻어먹었던 짐꾼 만복과 봇짐장수 금례를 비롯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낫과 몽둥이를 거머쥔 채 결연한 표정으로 섰다. 천한 기생과 거지 선비를 비웃던 썩어빠진 세상에서, 이름조차 없는 가장 낮은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두 사람의 마지막 증인이자 구원자가 되어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단계 13] 마지막 반격 — 평양에서 돌아온 낡은 장부
다음 날 아침, 서진은 조태관의 끄나풀들이 뻔히 지켜보는 가운데 주막에서 짐을 챙겨 평양으로 향한다는 소문을 아주 요란하게 흘린 뒤, 정반대 방향인 남쪽 삼남 지방으로 내려가는 역참 길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태관이 보낸 날랜 왈패와 추격자들이 서진을 잡기 위해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남쪽으로 몰려가는 동안, 진짜 평양을 향해 북쪽 성문을 빠져나간 사람들은 낡은 누더기를 걸치고 장사꾼으로 완벽하게 위장한 짐꾼 만복과 금례였다. 두 사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이 부르트도록 산길을 내달려 마침내 평양성에 당도했고, 매향의 은인인 늙은 기생 설죽의 행방부터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설죽은 조태관의 암살 위협에 희생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기방의 생리를 꿰뚫고 있던 그녀는 조태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눈치채고, 평양성 밖 깊은 산속의 허름한 폐사지에 숨어들어 부엌의 공양주 노릇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만복 일행을 만난 설죽은 매향이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매향의 속량 날짜와 상황을 뼛속 깊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매향이 그토록 아끼던 금비녀를 자신이 직접 비단보에 싸서 관아에 들고 갔으며, 수령이 두 장의 문서에 나란히 걸쳐 붉은 관인을 쿵 하고 찍는 현장을 두 눈으로 명백히 보았다는 증언이었다.
설죽은 치마를 걷어붙이고 만복과 금례를 평양 관아의 늙고 완고한 창고지기에게 데려갔다. 40년을 관아에서 일한 창고지기는 처음에는 "권세가들의 무서운 권력 다툼에 미천한 내가 끼어들면 삼족이 멸한다"며 완강하게 문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금례가 품속에서 구겨진 편지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것은 창고지기가 병에 걸린 노모를 위해 약값을 구하려 전전긍긍할 때, 한양의 매향이 대필해 준 아들의 효심 어린 편지였다. 창고지기는 매향의 따뜻한 마음과 은혜를 떠올리며 마침내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그들이 퀴퀴한 먼지가 켜켜이 쌓인 지하 창고 구석에서 몇 년 전의 재정 장부를 미친 듯이 뒤진 끝에, 마침내 매향의 속량 대금으로 금비녀와 막대한 은전이 정식으로 관아에 귀속되었다는 기록과 반쪽짜리 관인이 찍힌 보관 문서를 기적적으로 찾아냈다. 바로 그 순간, 뒤늦게 속아 넘어간 것을 깨달은 조태관의 왈패들이 횃불을 들고 평양 관아로 들이닥쳐 장부를 내놓으라며 칼을 빼 들고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창고지기는 이미 진짜 장부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소금 자루 밑바닥에 깊숙이 숨긴 뒤였고, 왈패들에게는 쥐가 갉아먹어 훼손된 엉뚱한 장부를 던져주며 시치미를 뚝 뗐다. 만복과 금례는 진짜 재정 장부를 품에 안고 설죽을 짚더미 수레에 숨겨 태운 채, 칠흑 같은 밤길을 목숨 걸고 한양을 향해 채찍질하며 달렸다.
같은 시각 한양 도성, 윤서진은 수척해진 몰골로 유유히 조태관의 호화로운 저택을 제 발로 찾아갔다. 그는 완전히 절망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태도로, 조태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매향과의 혼인을 전면 부정할 테니 제발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무릎을 꿇었다. 조태관은 천하의 장원 급제자를 제 발밑에 꿇렸다는 지독한 승리감과 우월감에 도취하여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미리 치밀하게 작성해 둔 거짓 진술서를 서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 문서에는 '매향이 제 스스로 관기 신분을 속이고 서진을 농락하여 억지 혼인을 맺었다'는 추악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진은 진술서에 서명하기를 주저하는 척 벌벌 떨며 시간을 끌었고, 대신 조태관에게 연거푸 독한 술을 권하며 그의 자만심을 한껏 부추겼다. 승리에 도취해 취기가 머리끝까지 오른 조태관은 경계심을 완전히 허물고 광기 어린 눈으로 자신의 악행을 거리낌 없이 떠벌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멍청한 놈! 네놈이 그토록 사랑한다는 그 천한 기생년의 관기 장부 쪼가리 하나 고치는 것은, 내게는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수십 년 된 장부의 종이를 교묘하게 뜯어내고 새 종이를 끼워 넣어 수결을 조작하는 데 은전 몇 냥이면 충분했지!"
조태관의 입에서 결정적인 자백이 터져 나온 순간, 서진은 쥐고 있던 붓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평양의 관기 장부를 돈을 주고 뜯어고쳐 조작하셨다는 방금 그 훌륭하신 말씀, 내일 형조의 재심 자리에서도 한 치의 다름 없이 똑같은 목소리로 해 주시겠습니까?"
조태관이 무슨 헛소리냐며 비웃으려던 찰나, 저택 방 안의 거대한 산수화 병풍이 걷히며 묵묵히 숨어 있던 형조의 깐깐한 젊은 서리와 주막 손님 두 사람이 서늘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조태관의 비열한 자백은 형조 관리를 비롯한 명백한 증인들의 귀에 낱낱이 박혀버렸다. 조태관의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에서 술기운이 거짓말처럼 싹 가시며 공포로 하얗게 질려갈 바로 그 시각, 평양에서 목숨을 걸고 출발했던 낡은 짚더미 수레가 덜컹거리며 마침내 한양 성문 안으로 거칠게 들어서고 있었다.
[단계 14] 절정 — 옷고름을 풀자 뒤집힌 판결
마침내 매향의 운명을 가를 재심이 열리는 날, 형조의 널찍한 앞뜰에는 장원 급제자와 기생 아내의 기구한 사연을 전해 들은 도성의 백성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형틀 앞에 끌려 나온 조태관은 전날 밤 술자리에서 내뱉은 자신의 자백은 취중에 떠든 실없는 농담일 뿐이었다며 추악하게 발뺌했고, 설죽 일행이 평양에서 목숨 걸고 가져온 낡은 재정 장부마저 천것들이 길거리에서 급조해 낸 가짜라며 끝까지 발악하며 우겨댔다. 심문석에 앉은 형조의 늙은 당상관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권세가인 조태관의 눈치를 살피며 사건을 덮으려 웅성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무거운 옥문이 열리고 최종 심문을 받기 위해 매향이 뜰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며칠간의 옥살이로 파리하게 야위어 있었으나, 그 옛날 대동문 밖에서 서진에게 내어주었던 그 선명한 붉은색 저고리를 눈이 시리도록 단정하게 차려입고 결연한 눈빛으로 심문석 앞에 섰다. 조태관은 그 모습을 보며 "천한 관기 년이 신성한 관청에서 색기를 부리며 요사스러운 짓거리로 판관들을 홀리려 한다"며 비열하게 조롱을 쏟아냈다.
그러나 매향은 그 비웃음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형조 판서를 향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청했다.
"저는 사내들 앞에서 기생처럼 몸가짐을 흐트러뜨릴 뜻이 추호도 없사옵니다. 다만, 관아에 속한 엄정한 의녀(醫女)로 하여금 제 몸에 묶인 이 붉은 옷고름의 안쪽 솔기를 직접 살펴뜯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허락이 떨어지자 흰옷을 입은 의녀가 다가와 은장도로 매향의 붉은 옷고름 안쪽의 촘촘한 솔기를 극도로 조심스럽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형조 뜰을 짓누르는 가운데, 실밥이 투둑투둑 뜯어지고 마침내 그 안에서 밀랍이 발라진 노란 기름종이에 겹겹이 소중하게 싸인 낡은 문서 한 장이 세상의 빛을 보며 모습을 드러냈다. 문서를 펼치자, 비록 세월의 흔적으로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붓글씨의 먹은 번짐 하나 없이 깨끗했고, 평양 수령의 유려한 수결과 붉은 관인의 절반이 갓 찍어낸 듯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조태관이 눈을 부릅뜨고 "그것 또한 감옥에서 쥐어 짜낸 위조품이다!"라며 발악하듯 외치자, 매향은 금례가 들고 온 평양 재정 장부 사이의 보관 문서를 펼쳐 자신이 내놓은 원본과 나란히 맞대어 놓아 달라고 판관에게 요청했다.
형조 서리들이 두 장의 문서를 백성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조심스럽게 맞대는 순간, 뜰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반으로 갈라져 있던 붉은 관인의 둥근 테두리와 복잡한 문양이 마치 마법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하나로 둥글게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억지로 자를 수 없는 전통 한지 특유의 불규칙한 닥섬유 결집과 찢어진 단면의 미세한 굴곡까지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려 떨어졌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그 누구도 가짜라 우길 수 없는 완벽하고도 명백한 진본임이 천하에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어 설죽이 앞으로 나서 자신이 금비녀를 바치고 문서를 받아온 과정을 낱낱이 증언했고, 늙은 창고지기가 장부의 보관 내력을, 그리고 조태관의 협박에 도망쳤다 매향이 대신 옥고를 치른다는 소식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아온 평양 상인마저 속량 대금 거래의 진실을 낱낱이 고변했다.
매향은 여세를 몰아 조태관이 결정적 증거로 제출했던 위조된 '기생 명부'의 치명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허점마저 만천하에 까발렸다. "대감께서 위조하여 끼워 넣은 새 장부에는, 제가 평양을 떠나 한양으로 온 지 2년이나 지나서야 청월관에 들어온 어린 기생 '월향'의 이름이 제 이름보다 석 달이나 앞선 날짜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낡은 기록에 현재의 기생 명단을 대충 베껴 쓰다 보니 시열이 뒤틀려 앞뒤가 맞지 않는 코미디를 연출하신 겝니다!"
형조 서리가 전날 밤 조태관 저택의 병풍 뒤에서 직접 들었던 술자리 조작 자백까지 낱낱이 증언하자, 권력에 빌붙어 장부를 조작했던 평양 관아의 아전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끝내 무릎을 꿇고 모든 죄를 자백했다. 조태관이 거액의 은전을 주고 장부를 뜯어내어 새 장을 끼우게 했다는 추악한 진실이 폭로된 것이다.
판결은 완벽하게 뒤집혔다. 형조 판서는 매향의 속량 절차와 서진과의 혼인이 국법에 어긋남이 없는 완벽히 적법한 것임을 공표했고, 윤서진의 과거 급제 역시 아무런 흠결이 없음이 선포되었다. 반면 문서를 악의적으로 위조하고 나라의 장원 급제자와 무고한 백성을 끔찍하게 모함한 조태관은 포승줄에 묶여 처참하게 압송되었다.
환호하는 백성들의 눈물겨운 함성을 뒤로하며, 심문석을 내려온 매향은 뜯겨 풀려 있던 붉은 옷고름을 주워 자신의 손으로 다시 꼿꼿하고 단정하게 묶어 내렸다. 한때 수많은 권세가 사내들이 제 더러운 욕망을 채우고자 함부로 풀려 했던 천한 기생의 옷고름이, 바로 그날 도성을 뒤흔들며 오만한 권세가의 거대한 거짓을 꽁꽁 옭아매어 파멸시키는 가장 강력하고 정의로운 올가미가 된 것이다.
[단계 15] 결말 — 정경부인이 된 기생의 마지막 한마디
천신만고 끝에 억울한 누명을 시원하게 벗어던진 윤서진은 마침내 임금의 하교를 받아 염원하던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도성의 화려하고 편안한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자청하여 백성들의 굶주림이 가장 극심한 척박하고 가난한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길을 택했다. 아내 매향 역시 기와집 안채에 고고하게 틀어박혀 비단옷을 입는 사대부 마님의 삶을 거부하고 흙먼지 날리는 소박한 무명옷을 입었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5일장이 서는 시끌벅적한 장터와 배들이 드나드는 마포 나루를 직접 두 발로 뛰어다니며 헐벗은 백성들의 생생한 절규와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
서진이 고을의 창고를 열어 구휼미를 넉넉히 풀 때면, 매향은 특유의 예리한 눈썰미로 창고의 출납 장부와 고을의 호구 기록을 교차 대조하여, 쌀알 한 톨이라도 중간에서 부패한 아전들의 주머니로 교묘히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감시했다. 또한, 까막눈이라 장부를 읽지 못해 관아의 농간에 속아 넘어가는 가난한 아낙과 소작농들을 위해, 배급되는 곡식의 정량을 나무패의 눈금과 콩알의 개수로 알기 쉽게 표시하는 기발한 제도를 고안해 내었다. 처음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천한 기생년의 잔머리로 나라의 체통을 깎아내린다"며 격렬하게 비웃고 손가락질했으나, 두 사람의 헌신 덕분에 그 흉년에도 그 고을에서는 단 한 명의 백성도 굶어 죽지 않았다는 기적 같은 소문이 돌자, 이내 다른 고을의 수령들조차 부끄러움을 느끼고 서진과 매향의 구휼 방식을 앞다투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서진이 점점 더 높은 벼슬자리로 승차할 때마다, 그는 남대문 밖 허름한 잿더미 주막에서 아내와 눈물로 나눴던 치열한 토론과, 불탄 벽에 쓰여 있던 약속을 단 하루도 가슴속에서 지우지 않았다. 그는 거대 권세가들의 부당한 청탁과 뇌물을 강직하게 물리치다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억울하게 한직으로 밀려나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억눌린 조선 백성들이 서진을 향해 보내는 압도적인 신망과 존경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져만 갔다.
수십 년의 흔들림 없는 세월이 흐른 뒤, 백발이 성성해진 윤서진은 마침내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인 조정의 최고 벼슬, 영의정(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곁을 평생 한결같이 굳건하게 지켜준 적처 매향에게도 마침내 내명부 최고 품계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이라는 고귀한 작호가 정식으로 내려졌다. 평양 기방에서 그녀를 술상 아래 벌레처럼 꿇어앉히려 안달 났던 권세가들과 도성에서 그녀를 천기라 조롱하던 콧대 높은 양반들은, 이제 그녀가 탄 가마가 지나갈 때면 길가에 엎드려 조아리며 허리를 굽혀야 했다.
정경부인이 된 매향의 처소로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화려하고 값비싼 명나라산 비단을 뇌물로 보내오는 간신배 양반들에게, 그녀는 그 비단들을 수레에 실어 고스란히 돌려보내며 수십 년 전 청월관에서 했던 그 서늘한 일갈을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비단은 그저 썩어갈 사람의 겉몸뚱이를 덮을 뿐, 부패한 사람의 흉측한 속내까지 귀하게 가려주지는 못하는 법이지요."
매향은 임금에게 칭송받으며 하사받은 거대한 재물과 땅을 털어, 남대문 밖 빈민촌에 가난한 아이들이 신분의 귀천이나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거대한 무료 학당을 세웠다. 주름이 깊게 파인 늙은 설죽은 그 학당에서 고아들에게 거문고를 타며 노래와 단정한 예법을 가르쳤고, 과거 목숨을 걸고 평양을 오갔던 짐꾼 만복과 금례는 이제 백발이 되어 빈민을 구제하는 거대한 구휼 창고를 도맡아 관리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날리던 어느 눈부신 봄날, 영의정의 관복을 입은 서진이 대동강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던 옛 평양 시절을 회상하며 아내 매향에게 넌지시 장난을 섞어 물었다.
"부인, 진정 부인이 보았다는 내 얼굴의 관상이 천하를 호령할 대단한 정승이 될 상이었소? 아니면 그저 가엾은 선비를 돕기 위한 하얀 거짓말이었소?"
매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녀처럼 맑게 소리 내어 웃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 관상 보는 재주 따위는 애초에 형편없었습니다. 다만... 짐승처럼 굶주린 몸으로도 진흙탕 속에서 끝까지 책을 끌어안아 지켜냈던 당신의 미련함과, 당장 쓰러질 듯 배가 고프면서도 내어준 귀한 죽 한 그릇을 문밖의 더 굶주린 걸인과 기꺼이 나누어 먹던 당신의 그 따뜻한 뒷모습을 보며 당신의 영혼을 믿었을 뿐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앞날과 운명은 얼굴 껍데기에 새겨진 얄팍한 상(相)이 아니라, 세상 그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둡고 외로운 순간에 스스로가 무엇을 꽉 쥐고 지켜내는지, 그 서글픈 행동에 깊이 새겨지는 법이니까요."
서진은 수십 년을 함께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알아본 아내의 눈이 세상 그 어떤 유명한 관상가의 눈보다 한없이 깊고 위대했다며, 깊은 존경을 담아 자신의 조강지처를 향해 정중히 큰절을 올렸다. 매향은 여전히 단정하게 입은 자신의 붉은 저고리의 옷고름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학당 마당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도성의 눈부신 봄하늘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세상은 한때 그녀를 천하디천한 기생년이라 짓밟고 조롱했으며, 훗날에는 하늘처럼 높은 정경부인 마님이라 칭송하고 우러러보았지만, 매향은 그 어떤 거짓된 이름에도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녀가 평생의 고난을 뚫고 얻어낸 가장 귀하고 눈부신 진짜 이름은, 진흙탕 속 진주 같은 한 사람의 올곧은 운명을 단박에 알아보고 그 험난한 길에 자신의 목숨과 운명까지 기꺼이 전부 걸었던 눈물겨운 '지기(知己)'이자 영원한 '아내'라는 이름이었다.
그 후로도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전설처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눈보라 치던 밤, 다 죽어가는 누더기 가난한 선비를 조선 최고의 어진 정승으로 만들어 낸 것은 부귀영화의 비단길도, 타고난 관상의 기운도 아니었다고. 그것은 오직 비루한 누더기 속에 감춰진 진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을 단숨에 알아보고 평생을 바친, 평양 출신 한 여인의 기막히고도 위대한 혜안과 굽히지 않는 사랑 덕분이었다고.
유튜브 엔딩멘트
누더기 속에서 사람의 진짜 가치를 알아본 매향과, 권세 앞에서도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은 윤서진 선비의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비단옷보다 빛났던 두 사람의 굳은 약속이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고 통쾌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꾹 눌러주시고요! 여러분이라면 매향처럼 운명을 걸 수 있었을지 댓글로 재미있는 감상도 남겨주세요. 다음 시간에도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