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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중 주막에서 만난 천생연분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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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295자)

    세찬 비바람을 피해 들어선 외딴 주막,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묘령의 여인과 하룻밤 은밀한 합궁을 나누게 된 떠돌이 보부상 만보. 그저 스쳐 지나갈 하룻밤 인연인 줄만 알았건만, 날이 밝자 여인은 만보의 남루한 봇짐을 보며 상상치도 못한 장사의 비책을 제시합니다. 엽전 한 푼 없던 두 사람이 조선 팔도를 뒤흔드는 대객주로 성장해 나가는 기막힌 여정과, 탐욕스러운 관아의 손길마저 단숨에 제압해 버린 여인의 천재적인 지혜가 지금 펼쳐집니다.

    ※ 1: 폭우 속의 주막, 젖은 옷을 벗기다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뚫린 듯 형용할 수 없는 장대비가 온 대지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거친 밤이었습니다. 먹구름은 한 치의 틈도 없이 하늘을 빼곡하게 메웠고, 그 틈새로 번뜩이는 번갯불은 마치 성난 용이 대지를 할퀴는 듯 기괴한 은빛 궤적을 그리며 번쩍였습니다. 거센 빗줄기는 산길을 고독하게 걷던 떠돌이 보부상 만보의 등때기를 사정없이 두들겼고, 사방은 가만히 손을 뻗어도 제 손가락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의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산속의 진흙 구덩이에 발이 빠져 허우적거리기를 수십 번, 만보는 이미 발가락 끝까지 스며든 축축한 냉기와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독한 한기에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짐을 가득 짊어진 어깨는 무쇠를 얹은 듯 무거웠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빗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이 악물고 걸음을 옮기던 중, 저 멀리 짙은 빗장막 너머로 가물거리며 흔들리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만보의 흐릿한 시야에 포착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동아줄과도 같았습니다. 만보는 죽을힘을 다해 웅덩이를 박차고 달려 나갔습니다.

    그곳은 인적마저 완전히 끊겨버린 산간벽지의 외딴 길목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낡고 허름한 주막이었습니다. 만보는 썩어가는 나무 문을 부서질 듯 거칠게 밀어젖히며 주막 내부로 들이닥쳤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눅눅하게 절어 있는 흙먼지 냄새와 비린 빗물 냄새가 사정없이 코를 찔렀습니다. 주막 안은 기름이 다 해가는 등잔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가늘게 흔들리며 방 안의 어두운 음영을 넓게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기묘할 정도로 고요한 사방에는 쏴아아 하는 세찬 빗소리만이 지붕을 뚫을 듯 요란하게 울려 퍼질 뿐, 주모나 일꾼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만보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사정없이 떨려와 바닥에 힘겹게 젖은 가죽 봇짐을 내려놓으며 거친 한숨을 토해냈습니다. 이빨이 서로 맞부딪쳐 딱딱거리는 소리가 좁은 방안을 메웠고, 온몸에 달라붙은 젖은 옷가지는 살가죽의 온기를 무자비하게 빼앗아 가고 있었습니다.

    "계십니까! 거기 아무도 없으십니까! 지나가던 행인인데 비를 피해 잠시 몸을 피하고자 합니다! 주모 계십니까!"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돌려받는 대답은 오직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천둥소리와 기괴한 바람 소리뿐이었습니다. 만보가 절망감에 휩싸여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쓰러지려던 그 찰나, 저 안쪽 방의 낡은 미닫이문이 지익 하는 나직한 마찰음을 내며 아주 천천히 열렸습니다. 만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고, 이내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허름한 무명치마를 소박하게 걸친 한 묘령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얼굴은 그 남루한 행색과 어두운 등잔불 빛으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기품이 넘쳐흘렀습니다. 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듯 맑고 투명한 피부, 가늘고 깊은 눈매,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앵두 같은 입술은 마치 신선 세계의 선녀가 길을 잃고 지상으로 내려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는 방 안의 어둠 속에서도 기이하게 반짝이며 만보의 혼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이리 모진 비바람을 뚫고 야산의 험한 길을 넘어오셨으니, 온몸의 뼈마디가 얼어붙으셨을 것입니다. 이대로 방치해 두면 독한 고뿔이 몸을 상하게 하여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으니, 체면 같은 것은 접어두시고 어서 방 안으로 들어와 군불을 쬐시지요."

    여인의 목소리는 깊은 밤 청아하게 울리는 은방울 소리처럼 맑고 고왔으며,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한 위안이 담겨 있었습니다. 만보는 사양할 틈도 없이 홀린 듯 여인의 손길이 이끄는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방 안은 이미 아궁이에 참나무 장작을 가득 지폈는지 후끈하고 달콤한 온기가 바닥에서부터 은은하게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방안의 따스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오히려 온몸에 밀착해 있던 축축한 젖은 옷이 가려움과 더불어 혹독한 한기를 더 자극했습니다. 만보가 몸을 웅크리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여인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조용히 만보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가녀린 손을 뻗어 물에 젖어 단단히 뭉쳐진 만보의 저고리 옷고름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습니다. 만보는 갑작스러운 여인의 대담하고 은밀한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치려 했습니다. 사내로 태어나 이토록 가깝게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만보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흉통을 뚫고 나올 듯 요란하게 요동쳤습니다.

    "부, 부인! 이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내 비록 비천한 장사꾼이라 하나 법도를 아는 사내입니다. 이리 남녀가 유별한데 낯선 사내의 몸에 손을 대시다니요!"

    "법도보다 귀한 것이 목숨이며, 격식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지금 그대의 저고리는 차가운 얼음덩어리와 다름없어, 이대로 두면 심장이 멎을 것입니다. 내 어찌 살고자 들어온 사람을 법도라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얼어 죽게 방치하겠습니까. 부디 내 뜻을 고이 받아들여 몸을 맡기십시오."

    여인은 흔들림 없는 단호하고도 고요한 눈빛으로 만보를 응시하며 그의 거친 저고리를 어깨너머로 부드럽게 벗겨내었습니다. 사내의 우람하고 단단하지만 얼룩진 맨살이 드러나자 방 안의 공기는 한층 더 묘한 온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의 고운 손가락 끝이 만보의 젖은 가슴팍과 단단한 어깨를 스칠 때마다, 찌릿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한 전율이 만보의 척추뼈를 타고 뇌리까지 강렬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빗물에 젖은 여인의 무명치마 틈새로 은은한 살구꽃 향기가 풍겨와 좁은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만보는 여인의 뽀얀 어깨선과 가느다란 목덜미 아래로 은은하게 비치는 속살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사연이 없는 이가 어찌 이 깊은 산중의 허름한 주막에 홀로 머물겠습니까. 나 또한 갈 곳을 잃고 잠시 이 세찬 비를 피해 머무는 처량한 신세에 불과합니다. 그대 역시 먼지 가득한 봇짐을 진 것을 보니 팔도 강산을 눈물로 떠도는 보부상인 듯한데, 거울을 보지 않아도 그대의 몰골이 얼마나 젖어 사경을 헤매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 마시고 어서 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십시오."

    여인은 자신의 겉옷마저 가볍게 풀어 던지며 하얗고 얇은 속적삼 차림으로 넓은 무명이불을 넓게 펼쳤습니다. 등잔불 아래 비친 여인의 자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과 같았으며, 만보의 모든 이성과 경계심을 단숨에 마비시켰습니다. 창밖의 빗소리는 갈수록 기세를 더해가며 세상을 삼켜버릴 듯 포효했지만, 이 밀폐된 방안만큼은 세상의 모든 혼란으로부터 격리된 극락과 같았습니다.

    "밤은 한없이 길고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차가운 산바람은 방 안의 구멍 난 창호지를 흔듭니다. 이 지독한 한기를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의 따뜻한 살을 맞대어 온기를 나누는 것뿐이지 않겠습니까."

    여인의 나직한 숨결이 만보의 귀밑샘을 간지럽히는 순간, 등잔불의 불씨가 훅 하고 불어 꺼지며 방 안은 완전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뜨거운 호흡이 얽혔고, 만보는 여인의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몸을 품에 안으며 깊은 황홀경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가차 없이 내리치는 빗소리를 배경음 삼아, 두 사람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숯가마가 되어 서로의 한기를 흔적도 없이 녹여내었습니다. 만보는 이것이 장대비가 내리는 밤에 겪는 한바탕 허망한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천대받고 무시당하며 먼지 낀 저잣거리에서 뒹굴던 비천한 자신에게, 어찌 이토록 고결하고 눈부신 여인과의 은밀한 밤이 허락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품에 안긴 여인의 실재하는 뜨거운 체온과 고운 숨소리는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설희라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한없이 가녀리면서도 놀라운 강인함으로 만보의 영혼을 깊이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사흘 밤낮보다 더 길고 진한 하룻밤의 은밀한 합궁을 치러내며 서로의 심장에 지울 수 없는 강렬한 낙인을 새겼습니다.

    ※ 2: 봇짐 속의 모래알을 황금으로 바꾸는 눈빛

    길고 잔인했던 밤의 비바람이 마침내 기세를 죽이고 잦아들 무렵, 깊은 산골 주막의 찢어진 창호지 틈새로 푸르스름하고 서늘한 새벽빛이 조용히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만보는 눈을 뜨자마자 마치 무언가에 홀렸던 것처럼 황급히 옆자리를 더듬었습니다. 혹여나 어젯밤의 일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은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옆자리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고, 고개를 돌리자 이미 단정하게 매무새를 갖춘 여인이 거울도 없는 벽면을 보며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있었습니다. 간밤의 격정적인 흐트러짐은 온데간데없이, 아침 햇살을 받는 여인의 얼굴은 맑은 호수처럼 차분하고 고결한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만보는 왠지 모를 쑥스러움과 송구함에 이불을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어, 어젯밤에는 내 너무 한기에 취하고 정에 이끌려 낭자에게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밤새 걱정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렸소이다. 내 이름은 만보라 하오. 글 한 자 제대로 읽지 못하고 오직 튼튼한 두 다리 하나로 전국을 돌며 헐값에 물건을 떼어 파는 보잘것없는 하급 보부상에 불과하오. 낭자의 고결한 신색에 비하면 나는 참으로 누추한 사내요."

    여인은 머리빗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만보를 돌아보며 안개가 걷히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제 이름은 설희라 합니다. 만보 정형, 어찌 스스로를 이리 낮추어 말씀하십니까. 생사의 경계에서 서로를 구하기 위해 온기를 나누었으니 그것은 하늘이 점지해 주신 인연이지,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자, 송구한 마음은 접어두시고 저기 젖어 있는 그대의 봇짐을 이쪽으로 가져와 풀어봐 주시겠습니까? 장사꾼의 봇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설희의 영롱한 요구에 만보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조차 부끄러운 넝마주의 같은 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희의 투명한 눈망울을 거절할 수 없어 만보는 쭈뼛거리며 방구석에 던져져 있던 젖은 가죽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보따리가 열리자, 안에서는 물에 젖어 눅눅해진 거친 마포 천 몇 필과 군데군데 녹이 슬고 이가 빠져 쓸모없어 보이는 놋그릇들, 그리고 산길에서 아무렇게나 캐서 말린 정체불명의 비틀어진 약초 뿌리들이 초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사막의 먼지투성이 길바닥에서 주워왔다 해도 믿을 법한 형편없는 잡동사니들의 향연이었습니다.

    '아, 참으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구나. 평생을 이 산 저 산 넘나들며 목숨 걸고 장사를 해왔건만, 겨우 이따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물건들만 짊어지고 다녔다니. 이토록 총명하고 아름다운 낭자가 내 봇짐을 보고 얼마나 속으로 비웃고 실망하겠는가.'

    만보는 스스로가 한심하여 고개를 푹 숙였지만, 설희는 단 한 번의 찌푸림도 없이 봇짐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녀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진흙이 묻은 거친 마포 천을 만져보고, 이 빠진 놋그릇을 두드려 소리를 들었으며, 비틀어진 약초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습니다. 그 순간 설희의 눈동자가 밤하늘의 샛별처럼 번뜩이며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장사꾼의 눈이 아니라, 세상을 관통하는 천재의 통찰력을 담은 눈빛이었습니다.

    "정형, 이 물건들을 보아하니 참으로 순진하게 장사를 하셨군요. 이 물건들은 저잣거리에서 그저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모아온 것들입니다. 하나, 장사란 단순히 잘 만들어진 물건을 비싸게 파는 기술이 아닙니다. 진정한 장사는 쓸모없는 물건에 가치를 불어넣어 사람의 마음을 간절하게 만드는 법이지요. 여기 이 거친 마포 천은 결이 너무 투박하여 옷을 해 입기에는 부적합해 보이나, 그 어떤 천보다 실이 두껍고 질기기가 으뜸입니다. 지금 나라에서 한양 근처에 거대한 둑을 쌓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들었습니다. 일꾼들이 돌과 흙을 나를 때 쓰는 튼튼한 작업복이나 흙포대로 이보다 훌륭한 자재는 없습니다. 이 마포를 일꾼용 옷으로 재단하여 관가 근처에 내다 팔면 금세 불티나게 팔릴 것입니다."

    만보는 설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을 벼락처럼 때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분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비틀어진 약초는 일반적인 삼이 아니라 야산에서 자란 토종 도라지 뿌리입니다. 모양은 뒤틀리고 썩은 것처럼 추해 보이나 향이 이토록 강한 것을 보니 수십 년은 묵은 깊은 놈입니다. 이제 곧 찬 바람이 불고 겨울이 오면 도성 안의 수많은 노약자와 아이들이 독한 기침 고뿔로 고생할 것입니다. 이 도라지들을 곱게 갈아 달콤한 꿀에 재워 감기 예방약으로 포장하여 양반가의 안방에 들이민다면, 저들은 이 뒤틀린 도라지 한 뿌리를 황금 한 돈의 가치로 아낌없이 사들일 것입니다."

    만보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설희를 바라보았습니다. 평생을 저잣거리에서 굴러먹으며 장사를 자처했던 자신은 그저 남들이 파는 물건을 헐값에 사서 한 푼이라도 남기고 넘기기에 급급한 장사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물건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고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장사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설희 낭자, 그대의 혜안이 참으로 놀랍고 무섭소이다. 나는 그저 이 물건들이 썩지 않기만을 바라며 헐값에 처분할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낭자의 설명을 들으니 내 눈앞에 수천 냥의 엽전 궤짝이 굴러다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오. 어찌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하실 수 있단 말이오?"

    "정형, 세상의 만물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그저 길가의 모래알에 불과하나, 쓰임새를 찾아 올바른 사람에게 전해지면 그것이 곧 황금이 되는 법입니다. 정형의 튼튼한 다리와 넓은 활동 반경, 그리고 저의 이 미천한 지혜와 기획력이 합쳐진다면 우리는 이 초라한 봇짐을 시작으로 조선 천하의 상권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저를 믿고, 이 험난한 상인의 길을 저와 동반자가 되어 함께 걸어가 보시겠습니까?"

    설희가 내민 가녀린 손을 보며 만보의 가슴속에서는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뜨거운 야망과 자신감이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돈을 벌겠다는 탐욕이 아니라, 이 위대한 여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당당한 사내로서 세상을 호령하고 싶다는 숭고한 의지였습니다. 만보는 설희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3: 첫 장사의 대성공과 한양 입성

    설희의 탁월한 진두지휘 아래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세상이라는 거대한 도화지에 장사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설희는 만보가 가져온 거친 마포 천들을 전부 수거하여 맑은 개울물에 깨끗이 빨아 햇볕에 바짝 말린 뒤,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천연 염료로 가볍게 색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일꾼들이 거친 돌을 나를 때 소매나 무릎이 쉽게 닳지 않도록 이중으로 덧대어 바느질한 활동성 극대화의 작업복 백 벌을 제작했습니다. 만보는 이 옷들을 짊어지고 한양 인근의 대규모 둑 보수 공사장으로 향했습니다. 현장의 인부들은 매일 거친 돌더미에 부딪혀 하루가 멀다고 찢어지는 얇은 옷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였습니다. 만보가 내놓은 무쇠처럼 질기면서도 땀 배출이 잘되는 마포 작업복을 입어본 일꾼들은 너도나도 돈을 싸 들고 만보의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것 좀 보시오! 이 옷은 아무리 자갈밭에 뒹굴어도 올 하나 풀리지 않는구려! 가격도 일반 비단이나 무명보다 훨씬 저렴하니 우리 같은 일꾼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보물이 없소이다! 어이 행수, 나도 세 벌만 더 주시오!"

    일꾼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준비해 간 백 벌의 옷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완전히 매진되었습니다. 한 벌당 제작비는 단 엽전 몇 푼에 불과했으나, 가치를 인정받아 판 가격은 그 수십 배에 달했습니다. 만보는 첫 장사에서 손에 쥔 거액의 서찰과 엽전 주머니를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설희는 기뻐하는 만보를 차분히 가라앉히며 다음 단계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정형, 이제 이 자금을 밑천 삼아 충청도와 강원도의 심산유곡을 돌며 질 좋은 도라지를 대량으로 매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양 도성 주변의 양봉업자들을 찾아가 꿀을 대량으로 선매수하십시오. 계절의 침묵이 끝나고 첫서리가 내리는 날, 우리는 한양의 심장부로 들어갈 것입니다."

    설희의 예견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습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이슬이 서리로 변하자, 한양 도성에는 유례없는 독한 기침 고뿔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한 통증에 시달리던 도성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대가집 대감들까지 기침 소리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습니다. 이때 설희가 숙성시킨 도라지 꿀절임 단지들이 한양의 약방 골목에 등장했습니다. 달콤하면서도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도라지 약꿀은 마시는 즉시 기침을 멎게 하는 신통한 효능을 발휘했습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궐 안의 상궁들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급기야 왕실의 납품권까지 획득하게 되는 기적적인 경사에 이르렀습니다.

    "설희 낭자! 정말 대단하오! 매일 저녁 우리 임시 거처의 방바닥에 쌓이는 엽전 더미를 보면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아직도 그 폭우 속 주막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오. 낭자는 진정 하늘이 내게 내린 요정이거나 신선이 분명하오!"

    "정형, 아직 놀라기는 이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작은 징검다리에 불과합니다. 진짜 장사는 도성의 거상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양의 양대 시장, 즉 이현(梨峴)과 칠패(七牌)의 중심에 우리만의 깃발을 꽂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시 거처를 벗어나 정식으로 상단을 등록하고 거대한 '객주'를 차려야 합니다."

    설희는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단 한 푼도 사치스럽게 소비하지 않고, 한양 도성의 교통 요충지이자 물류의 중심지인 서소문 인근에 웅장한 규모의 객주 건물을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갈 곳 없는 부랑민들과 가난한 떠돌이 보부상들을 모아 그들에게 따뜻한 밥과 청결한 잠자리를 무상으로 제공했습니다. 대신 그들이 물건을 안전하게 나를 수 있도록 공평하고 파격적인 수준의 임금을 책정하여 지불했습니다. 기존의 거상들이 보부상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착취하던 것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행보였습니다. 설희의 대가 없는 인덕과 공정한 거래 방식에 크게 감복한 보부상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설희의 객주를 위해 일하겠노라 맹세했습니다. 이로 인해 설희의 객주는 순식간에 전국 팔도의 물류 흐름과 사소한 소문까지 하루 만에 수집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초강력 정보망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길바닥에서 멸시받던 보부상 만보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설희는, 이제 한양의 저잣거리를 넘어 조정의 경제까지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대객주 상단의 주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 4: 투전판의 함정과 어둠의 그림자

    설희와 만보의 대객주가 한양의 중심인 이현과 칠패 시장을 넘어 한강 나루터의 물류권까지 독식해 들어가자, 도성의 내로라하는 세도가들과 기존 거상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의정 김 대감의 든든한 뒷배를 믿고 한양의 독점 상권을 좌지우지하며 온갖 폭리를 취하던 송상(松商)의 우두머리 송 객주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대낮의 정당한 물량 싸움이나 가격 경쟁으로는 설희의 귀신같은 장사 수완과 촘촘한 보부상 정보망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차례 고배를 마신 송 객주는 결국 정공법 대신, 가장 어둡고 비열하며 확실한 덫을 놓아 그들의 거대한 뿌리를 단숨에 뽑아버리기로 모의했습니다. 타겟은 대객주의 한 축이자, 순박하고 우직하여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약점을 지닌 동업자 만보였습니다.

    어느 가을밤, 사방이 짙은 안개로 자욱하여 도성의 이정표마저 흐릿하게 보일 무렵이었습니다. 평소 만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몇 번의 도움을 주어 만보가 형님처럼 믿고 따르던 타 상단의 김 행수가 숨을 헐떡이며 대객주의 뒷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이마에 땀방울을 송골송골 흘리며 만보의 옷소매를 다급하게 부여잡았습니다.

    "만보 아우, 큰일났네! 정말 큰일이 터졌어! 이번에 자네 상단과 우리 상단이 공동으로 강원도 평창에서 들여오려던 귀한 약재와 임산물 수송단이, 삼포 지역의 관아 포졸들에게 밀수품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통째로 압류당했다네!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자네가 선금으로 지불한 수만 냥의 계약금은 물론이고 우리 상단의 목줄까지 단숨에 날아가게 생겼어. 다행히 내 이 사태를 한방에 해결해 줄 수 있는 훈련도감의 거물급 군관 나리를 긴급히 소개받았는데, 그 양반이 워낙 이목을 두려워하고 은밀한 것을 좋아해 도성 변두리 피맛골 깊숙한 곳의 비밀 가옥에서만 사람을 만난다 하더군. 아우가 나와 함께 가서 무게를 좀 잡아주어야 일이 성사되겠네. 어서 가세, 시간이 없네!"

    상단의 존폐가 걸린 일이라는 말에 만보는 앞뒤 잴 겨를도 없이 겉옷만 대강 걸친 채 김 행수의 뒤를 쫓아 한양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미로처럼 얽힌 음침한 골목길 끝에 위치한 낡은 기와집에 들어서자, 문틈 사이로 퀴퀴한 담배 연기와 자욱한 가마솥 열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안방의 문을 열자 밖의 허름한 풍경과는 딴판으로 화려한 병풍이 둘러쳐져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비단 옷을 거만하게 걸쳐 입은 군관 차림의 사내와 몇몇 상인들이 둘러앉아 엽전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사내는 만보를 보자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술잔을 채워 건넸습니다.

    "오호, 자네가 요즘 한양 도성에서 떠오르는 샛별이라 불리는 대객주의 동업자 만보인가? 덩치를 보니 과연 보부상 우두머리답게 기백이 넘치는군. 강원도 약재 압류 건이야 내 조정에 말 한마디만 넣으면 당장 내일 아침이라도 풀려날 사소한 일이지. 헌데 사내놈들끼리 칙칙하게 앉아 장부 이야기만 하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관아의 서류가 정리되어 도착할 때까지 한 시진 정도 남았으니, 지루함을 달랠 겸 가볍게 패나 몇 판 돌리며 긴장을 풀세나. 장사꾼이라면 이 정도 풍류는 즐길 줄 알아야지?"

    만보는 본래 설희와 약조하여 투전이나 노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상단의 목줄을 쥔 군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가 행여 약재 통관 일이 틀어질까 두려웠습니다. 또한 곁에서 김 행수가 은근히 옆구리를 찌르며 눈짓을 해대자, 만보는 마지못해 투전판의 멍석 가장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처음 몇 판은 가볍게 푼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만보가 패를 잡는 족족 기막힌 숫자들이 연이어 들어왔고, 불과 반 시진 만에 수백 냥의 엽전이 만보의 무릎 앞으로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돈방석에 앉은 기분과 함께 연거푸 들이켠 독한 인삼주 기운이 뇌리를 지배하자, 평소 이성적이던 만보의 경계심은 모래성처럼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놀이로구나. 내 장사 수완도 좋지만 타고난 재수도 이리 강하니, 오늘 밤 이 투전판을 싹 쓸어 모은 돈으로 설희에게 도성에서 가장 값비싼 옥가락지와 비단을 선물해 주리라.'

    흥분과 탐욕에 눈이 먼 만보가 완전히 사리분별을 잃은 그 순간, 판의 흐름은 송 객주가 미리 심어둔 전문 노름꾼들의 손기술에 의해 급격하게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만보가 쥐고 있던 천하무적의 패가 마지막 끗수 차이로 상대방의 묘한 패에 짓밟히는 기이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났습니다. 불과 세 판 만에 땄던 돈은 물론이고, 품고 왔던 대객주의 가을철 운영 자금 수천 냥까지 고스란히 털려 나갔습니다. 이성을 잃은 만보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이럴 리가 없소! 한 판만 더 합시다! 내 이번에는 반드시 잃은 돈을 전부 되찾고 말 것이오!"

    비단 옷을 입은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소매 안에서 누렇게 바랜 가죽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만보의 눈앞에 흔들었습니다.

    "허허, 만보 행수. 이미 자네 주머니는 먼지만 날릴 정도로 바닥이 난 듯싶은데 뭘 믿고 판을 이어가겠다는 건가? 듣자 하니 자네들이 서소문 한복판에 일군 거대한 대객주의 소유권 양도 문서가 그리 가치가 높다던데, 정 원한다면 그 양도 문서를 판돈 담보로 삼아 마지막 한 판을 크게 벌여보지 않겠나? 자네 대장부의 기백이 그것밖에 안 되는가?"

    동료 김 행수마저 곁에서 "이번 판만 이기면 본전은 물론이고 한양의 송상 상권까지 단숨에 빼앗을 수 있네!"라며 파멸의 부채질을 해댔습니다. 술기운과 패배감, 그리고 압박감에 눈이 뒤집힌 만보는 결국 품 안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대객주의 인장과 양도 서류를 꺼내어 백지 계약서 위에 붉은 인장을 사정없이 찍어 누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패 돌림 끝에, 판을 주도하던 노름꾼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필승의 패를 펼쳤습니다. 만보의 눈앞이 순간 새하얗게 변하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차가운 새벽 서리가 내리는 시간이었고, 비밀 가옥의 사내들과 믿었던 김 행수는 만보가 지장을 찍은 객주 양도 문서를 챙겨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만보는 텅 빈 방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붉은 인장 자국을 바라보며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아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란 말이냐! 설희가 피와 땀, 눈물로 일구어낸 우리 상단의 목숨줄을 내 어리석은 손가락 하나로 통째로 악마들에게 넘겨주다니! 내 죽어도 씻지 못할 대역죄를 지었구나!"

    자책감에 사로잡힌 만보는 한강 물에 몸을 던져 목숨으로 사죄하겠다는 일념으로 비틀거리며 도성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설희의 얼굴이 떠올라 마지막 순간에 죽지도 못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아침 햇살이 비치는 대객주의 마당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날이 밝자마자 송 객주가 고용한 수십 명의 험악한 왈패들과 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대객주의 정문을 부수듯 밀치고 들어와 마당 한가운데에 버티고 섰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만보의 지장과 서명이 선명하게 박힌 객주 양도 문서가 들려 있었습니다. 상단의 행수들과 일꾼들은 영문도 모른 채 혼란에 빠졌고, 평화롭던 대객주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방으로 변해버렸습니다.

    ※ 5: 관아의 덫을 깨부수는 여인의 묘책

    대객주 마당에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머리가 깨지도록 바닥에 찧으며 사죄하는 만보를 바라보는 설희의 눈빛은, 의외로 한없이 고요하고 평온했습니다. 사태의 전말을 들은 상단의 다른 행수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만보를 비난할 때도, 설희는 조용히 다가가 만보의 흙먼지 묻은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쥐며 단단한 음성으로 대중을 진정시켰습니다.

    "정형, 고개를 드십시오. 장사꾼의 험난한 바다에서 벌어지는 음모는 겪어보지 않은 순진한 사람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덫입니다. 저들이 칼을 뽑아 우리의 목을 겨누었다면, 우리는 그 칼날을 움켜쥐고 저들의 가슴을 찌르면 됩니다. 정형이 지은 죄는 제가 함께 짊어질 것이니, 더는 눈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저 간악한 무리에게 넘어갈 우리 대객주의 벽돌 한 장, 먼지 한 톨도 없을 것입니다."

    설희는 송 객주가 위세 등등하게 내민 양도 문서를 건네받아 불빛에 비추어 세밀하게 살폈습니다. 문서에는 만보의 지장과 인장이 찍혀 있었고, 관아의 서명까지 위조되어 언뜻 보기에는 한 치의 허점도 없는 완벽한 권리 문서처럼 보였습니다. 송 객주는 한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의 사또와 포졸들까지 미리 매수한 채 대동하고 나타나, 거드름을 피우며 침을 뱉었습니다.

    "설 대행수, 상황 파악이 아직 안 되는 모양이군! 여기 네 동업자 놈이 어젯밤 도박판에서 대가로 건 대객주 전체 소유권 양도 서류가 똑똑히 살아있다! 관아의 사또 나리께서도 법도에 따라 이 객주를 우리 송상에게 인도하라는 판결을 내리셨으니,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당장 봇짐을 싸서 나가거라! 만약 저항한다면 여기 포졸들이 대역죄와 사기죄로 너희 모두를 감옥에 쳐넣을 것이다!"

    매수된 한성부 사또 역시 가당치도 않은 위엄을 피우며 수염을 쓸어내렸습니다.

    "대객주의 설 대행수는 들으라. 사사로운 거래라 할지라도 인장이 찍힌 서류가 존재하니 이 객주의 소유권은 송상에게 넘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법을 집행하는 관원의 명령이니 즉시 객주를 비우고 물러가라."

    상단의 백여 명의 보부상들이 억울함에 치를 떨며 몽둥이를 쥐어 잡고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설희는 가볍게 소매를 털며 군중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녀의 고결하고 단아한 얼굴에는 추호의 두려움이나 흔들림도 없었으며, 오히려 거만한 송 객주와 사또를 가소롭다는 듯이 응시하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송 대행수, 그리고 사또 나리. 사내들의 치기 어린 술자리 장난을 빌미로 이리 관아의 병력까지 동원하여 대부대를 이끌고 오시다니, 우리 대객주를 이토록 높이 평가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 머리가 나쁘면 음모도 제대로 꾸미지 못하는 법이지요. 저들이 들고 있는 저 양도 문서는 애초에 법적 효력이 전혀 없는 원천 무효의 휴지조각에 불과합니다."

    "무슨 소리냐! 여기 만보의 인장과 지장이 찍혀 있거늘 감히 발뺌을 하려 드느냐! 사또 나리 앞이다, 요사스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말라!"

    설희는 소매 안에서 옥색 비단으로 감싸인 서찰 한 장을 꺼내어 사또의 눈앞에 넓게 펼쳤습니다. 그 서찰의 하단에는 놀랍게도 어보(御寶)와 호조 판서의 관인이 붉고 선명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사또 나리, 눈이 있으시면 이 문서를 똑똑히 보십시오. 우리 대객주와 상단의 모든 토지, 건물, 그리고 전국의 물류 창고는 이미 반년 전, 도성 안의 가난한 빈민들을 구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활빈을 베풀기 위해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의 공동 귀속 국유 자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 객주의 소유권은 저나 만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조선 왕실과 국가의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만보 정형은 국가로부터 위탁을 받아 상단을 대리 운영하는 일개 전문 경영 행수에 불과합니다. 소유권이 없는 자가 남의 재산, 그것도 국가와 임금님의 재산을 도박판 담보로 걸고 지장을 찍었으니, 이는 원천적으로 사기 계약이자 국유 재산 침탈 모의죄에 해당합니다. 사또 나리, 국가 재산을 도박 빚으로 양도받겠다고 우기는 저 송 객주와, 이를 승인해 주려 하신 나리의 행위가 의금부(義禁府)와 사헌부(司憲府)에 상소로 올라간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설희의 논리정연하고 매서운 일갈에 한성부 사또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바르르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설희는 상단이 급격하게 성장할 때부터 권세가들의 탐욕과 사적인 탈취 시도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세금은 투명하게 납부하되 상단의 법적 소유권을 국가 기관에 기부하는 형태로 귀속시켜 그 누구도 사적으로 침탈할 수 없도록 완벽한 법적 방어벽을 쳐두었던 것입니다.

    "또한, 송 객주가 불법 투전방을 개설하여 우리 행수를 납치하다시피 감금하고 약물을 섞은 술을 먹여 국가 재산을 갈취하려 모의한 증 좌가 이미 우리 보부상들의 정보망을 통해 고스란히 확보되어 있습니다. 사또 나리, 뇌물을 받고 대역죄인을 비호하려 하셨다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파직당한 뒤 귀양을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저 대역죄인들을 처단하여 치적을 쌓으시겠습니까? 선택은 나리의 몫입니다."

    사또는 자신의 목줄이 날아갈 위기에 처하자 순식간에 얼굴색을 바꾸어 송 객주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이, 이 천하의 역적 놈들이 감히 나라의 재산을 갈취하려 하고 나까지 속여 대역죄를 짓게 만들려 했구나! 여보라! 포졸들은 대체 무엇을 하느냐! 저 송 객주와 사기꾼 무리들을 당장 오라줄로 꽁꽁 묶어 의금부로 압송하라! 한 놈도 남김없이 처단하라!"

    기세등등하던 송 객주와 왈패들은 순식간에 포졸들에 의해 제압되어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갔고, 관아의 무리들은 썰물 빠지듯 허겁지겁 도망쳐 버렸습니다. 대객주의 마당에는 음모를 완벽하게 깨부순 설희의 천재적인 지혜를 찬양하는 보부상들의 우렁찬 만세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울려 퍼졌습니다.

    ※ 6: 팔도를 호령하는 대객주와 백년가약

    송 객주와 부패한 관원들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의금부의 단죄를 받게 되자, 한양의 상권 판도는 완전히 대객주의 손아귀로 재편되었습니다. 송 객주가 그동안 독점하며 폭리를 취하던 소금, 인삼, 비단 등의 전매권이 대객주로 고스란히 이양되었고, 임금님과 조정에서도 설희의 청렴하고 투명한 상단 운영을 극찬하며 전국의 물류를 총괄하는 관허 대객주로서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설희와 만보는 이 엄청난 권세와 부 앞에서도 결코 오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설희는 벌어들인 막대한 황금과 엽전을 자신들의 사치를 위해 쓰지 않고, 매 겨울마다 전국의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만 개가 넘는 죽 가마솥을 걸어 진휼을 베풀었으며, 가난하여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보부상들의 자녀들을 위한 서당을 전국 각 고을에 무상으로 건립했습니다.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설희를 '활빈의 어머니'로 추앙했고, 조정의 사대부들조차 그녀의 높은 덕망과 지혜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존경을 표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붉은 단풍과 황금빛 들판이 온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은 어느 깊은 가을날, 대객주의 넓고 화려한 안마당에서는 두 사람만의 소박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혼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양반가의 비단 혼례복 대신, 두 사람은 처음 인연을 맺었던 그 깊은 산골 주막의 밤을 기리기 위해 깨끗하게 풀을 먹여 하얗게 빤 소박한 무명옷을 입고 서로를 마주 보았습니다. 만보는 이제 조선 팔도의 모든 보부상들을 통솔하는 당당하고 늠름한 대행수로서, 세상을 구한 현명한 아내 설희의 고운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습니다.

    "나의 소중한 설희여. 만약 그 폭풍우 치던 밤, 외딴 주막에서 낭자를 만나 젖은 옷을 벗기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던 그 기적 같은 하룻밤의 인연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 만보는 길바닥에서 이름 없이 얼어 죽은 해골이 되었을 것이오. 내 평생 그대의 거룩한 지혜와 따뜻한 마음을 심장에 새기고, 그대가 걷는 모든 길에 가장 단단하고 든든한 디딤돌이자 버팀목이 되어 목숨 바쳐 그대를 지키겠소."

    설희는 눈가에 맺힌 영롱한 눈물을 훔치며 만보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에 이마를 부드럽게 기대었습니다.

    "나의 듬직한 정형이여. 험난하고 요사스러운 장사의 바다에서 저의 지혜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저를 믿고 묵묵히 폭풍우를 온몸으로 막아준 정형의 우직하고 정직한 성품 덕분이었습니다. 사내의 진정한 가치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품은 그릇의 깊이에 있음을 정형을 통해 배웠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차가움을 녹여주는 음과 양의 조화와 같으니, 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세상의 낮고 어두운 곳을 밝히며 함께 걸어갑시다."

    마당을 가득 메운 전국의 수천 명의 보부상들과 혜택을 입은 가난한 백성들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백년가약을 축복하며 오색 꽃가루를 하늘 높이 날려 보냈습니다. 천대받던 떠돌이 상놈 사내와 깊은 사연을 품고 숨어 살던 천재 여인이 만나, 서로의 한기를 보듬고 지혜를 합쳐 대제국을 일구어낸 기적 같은 사랑과 성공의 대서사시였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하고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고, 이 기막힌 성공담은 조선 팔도의 야담으로 널리 전해져 오늘날까지 가슴 따뜻한 전설로 길이길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유튜브 엔딩 멘트

    오늘 준비한 조선남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하룻밤의 은밀한 인연이 조선 팔도를 뒤흔든 위대한 성공 신화로 피어나는 과정, 재미있게 들으셨는지요? 인생의 거친 풍파 속에서도 서로를 믿고 지혜를 나누며 마침내 백년해로의 행복을 거머쥔 두 사람처럼, 우리 시청자 여러분의 삶에도 늘 따뜻한 귀인과 기적 같은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따뜻한 댓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