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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문이 몰락해 거지가 된 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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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로맨스, #오디오드라마, #청구야담, #신분역전, #거지왕초, #몰락양반, #순애보, #해피엔딩, #구원서사, #착한규수, #재벌남, #옛날이야기, #설화,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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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훅(Hooking) 멘트

    한양 도성 가장 낮은 다리 밑, 남루한 넝마를 걸친 거지 왕초의 가슴에 어느 날 한 송이 매화 같은 여인이 떨어졌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 더러운 허울을 벗고, 당신 앞에 당당히 서리라."
    가문이 몰락해 거지가 된 양반 도령과 그에게 온정을 베풀었던 다정한 규수.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의 신분이 송두리째 뒤바뀌게 되는데... 가장 천한 곳에서 피어난 가장 고귀하고 지독한 순애보, 그 놀라운 반전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다리 밑의 왕초가 되다

    조선의 심장, 한양 도성의 운종가는 언제나 사람들의 열기로 끓어올랐다. 팔도에서 몰려든 상인들의 외침, 짐바리를 실은 소들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팔짱을 낀 채 거드름을 피우며 걷는 양반들까지. 그 번화하고 눈부신 거리의 가장 깊고 어두운 그늘, 수표교 다리 밑에는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것들이 모여드는 축축한 둥지가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고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그곳에, 한양 바닥의 모든 거렁뱅이들을 호령하는 젊은 왕초가 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에는 먼지와 지푸라기가 엉겨 붙어 있었고, 얼굴은 땟국물로 얼룩져 본래의 이목구비를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계절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누덕누덕 기운 옷 틈으로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흉터로 남아 엿보였다. 그러나 그 남루한 행색 속에서도 이상하게 빛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형형하게 번쩍이는 두 눈동자였다. 다른 거지들이 썩은 음식을 두고 개처럼 다툴 때, 그는 조용히 다리 기둥에 기대앉아 밤하늘의 달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곤 했다.

    "천지가 불인(不仁)하여 만물로써 추구를 삼는다 하였거늘... 내 삶이 이리 한낱 지푸라기 개가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한문 구절을 읊조리는 왕초의 과거를 아는 이는 이 다리 밑에 아무도 없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그는 북촌에서 내로라하는 뼈대 있는 가문의 장손이었다. 사서삼경을 줄줄 외며 장차 조정에 나아가 큰 뜻을 펼치리라 기대받던 옥골선풍의 도령. 서책을 넘기던 하얗고 고운 손가락에서는 늘 은은한 묵향이 피어났고, 그의 걸음걸이에는 양반의 기품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가문의 몰락은 폭우처럼 갑작스럽고 잔인하게 찾아왔다. 조정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지에서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역시 화병으로 그 뒤를 따랐다. 가산은 모두 적몰되어 관아에 빼앗겼고, 친척들과 벗들은 역적의 집안이라며 썰물처럼 등을 돌렸다. 하루아침에 대궐 같은 기와집에서 길거리로 쫓겨난 도령은, 며칠을 굶주리며 헤매다 결국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양반의 알량한 체면 따위는 얼어붙은 주먹밥 한 덩이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살기 위해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 간 날, 기존의 거지패들은 고운 피부의 도령을 만만하게 보고 텃세를 부리며 흠씬 두들겨 팼다. 뼈가 부러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고통 속에서, 도령의 내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독기가 폭발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개죽음을 당해 아버님의 억울함을 역사에 영원히 묻히게 할 수는 없다!'

    그날 밤, 도령은 자신을 때렸던 덩치 큰 거지 우두머리가 잠든 틈을 타 몽둥이를 들고 그의 정강이를 내리쳤다. 비겁하다 욕할지언정 살아남아야 했다. 병법서에서 읽었던 지략과 전술을 싸움에 응용하며, 도령은 거칠고 야만적인 다리 밑 세계를 하나둘 평정해 나갔다. 무식하게 힘만 쓰는 자들에게는 치밀한 함정을 파서 무릎 꿇렸고, 굶주림에 지친 어린 거지들에게는 자신이 얻어온 식량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며 마음을 얻었다.

    양반으로서 배운 학문과 통솔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지패를 이끄는 데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는 무질서하던 거지들에게 구역을 나누어주고, 상인들과의 마찰을 피하는 법을 가르치며 수표교 일대의 규율을 세웠다. 불과 1년 만에 다리 밑의 모든 무리들이 그를 '왕초'라 부르며 납작 엎드렸다.

    이제 그는 도령이 아니었다. 한양 바닥에서 가장 주먹이 맵고 머리가 비상한 거지 왕초일 뿐이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스며드는 겨울밤의 추위 속에서, 찢어진 동냥 바가지를 베고 누울 때면 어김없이 잃어버린 과거의 환영이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따뜻했던 온돌방,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억울하게 눈을 감은 아버지의 얼굴. 왕초는 짐승처럼 울음을 삼키며 부서진 손톱으로 언 땅을 긁었다. 언젠가 이 지옥 같은 진흙탕을 벗어나리라는 독한 다짐만이, 어둠 속에서 그의 심장을 간신히 뛰게 만들고 있었다.

    ※ 2: 매화향 같은 그녀를 만나다

    혹독했던 겨울이 물러가고 한양성에도 어김없이 춘색이 찾아왔다. 처마 끝에 매달렸던 고드름이 녹아내리고, 양반집 담장 너머로는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러나 봄이 왔다고 해서 다리 밑의 배고픔까지 녹아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춘궁기, 이른바 보릿고개가 시작되면서 거지들의 동냥 바가지는 날이 갈수록 가벼워졌다. 굶주림에 허덕이며 쓰러지는 어린 거지들을 보다 못한 왕초는 결단을 내렸다.

    "오늘은 북촌으로 간다. 그곳 대감댁들이라면 광에 쌀이 썩어나갈 터, 봄맞이 적선이라도 바라고 가보자꾸나."

    왕초의 지시에 따라 수십 명의 거지 떼가 짚신을 질질 끌며 가파른 북촌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으리으리한 솟을대문과 기와지붕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부촌의 풍경은, 그들이 사는 다리 밑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별천지였다. 왕초는 굳은 표정으로 무리를 이끌고 가장 크고 기품 있어 보이는 대감댁 문 앞에 섰다. 과거 자신이 살았던 집과 너무도 닮아 있는 그 위압적인 대문 앞에서, 왕초의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듯 시려왔다.

    "어르신들! 동냥 좀 주시옵소서! 며칠을 굶어 죽게 생겼사옵니다!"

    거지들이 구슬픈 목소리로 적선을 구걸하자, 대문이 삐걱 열리며 건장한 하인 몇 명이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이 냄새나는 거렁뱅이 놈들! 어디라고 감히 기어와서 재수 없게 곡소리냐! 당장 썩 물러가지 못할까!"

    하인들이 매섭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거지들을 위협했다. 놀란 거지들이 뒷걸음질을 쳤지만, 왕초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그의 눈빛은 매를 맞을까 두려워하는 거지의 것이 아니라, 불의를 호령하는 양반의 것처럼 매섭고 당당했다. 하인이 그 기세에 눌려 멈칫하는 순간, 대문 안쪽에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어라. 그분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 이르지 않았느냐."

    순간, 주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대문이 활짝 열리며, 연옥색 치마에 눈처럼 하얀 저고리를 입은 젊은 규수가 사뿐히 걸어 나왔다. 햇살을 받은 그녀의 자태는 너무도 눈이 부셔, 거지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며 뒷걸음질을 쳤다. 곱게 빗어 넘긴 흑단 같은 머리결, 초승달처럼 고운 눈썹, 그리고 가엾은 생명들을 바라보는 온기 가득한 눈동자.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봄바람을 타고 옅은 매화 향기가 번져나가, 북촌의 탁한 공기마저 정화하는 듯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광주리를 들고 나와 거지들의 깨진 바가지에 하얀 쌀주먹밥을 하나씩 담아주기 시작했다.

    "봄비가 차갑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음식이오나, 허기라도 면하시길 바랍니다."

    규수의 따뜻한 손길이 마침내 무리의 맨 앞에 서 있던 왕초에게 닿았다. 왕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가지를 내밀었다. 자신의 더러운 꼴이,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검은 손이 이토록 수치스럽게 느껴진 것은 거지 생활 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웅크린 왕초의 시야에, 옥처럼 하얗고 가녀린 그녀의 손이 들어왔다.

    주먹밥을 내려놓던 그녀의 손끝이 왕초의 거친 손등에 살짝 스쳤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왕초의 두 눈과, 다정하게 미소 짓는 규수의 두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간, 왕초의 시간은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거지를 향한 멸시도, 동정도 없었다. 그저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깊은 연민과 따뜻한 존중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왕초의 심장을 단숨에 깨부수었다. 잊고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 버려두었던 사내로서의 자존심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아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저 맑고 고운 여인 앞에서, 평생 이 더러운 넝마를 걸친 채 구걸하며 살 수는 없다!'

    그날 밤, 왕초는 얻어온 주먹밥을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다리 밑으로 내려와 차가운 개울물에 몸을 담갔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물살 속에서 그는 때에 전 피부를 돌멩이로 박박 문지르며 피가 나도록 씻고 또 씻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낮에 보았던 규수의 얼굴과 그윽했던 매화 향기만이 가득했다. 절망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 숨을 연명하던 거지 왕초의 가슴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겠다는, 기필코 저 여인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내로 다시 서고야 말겠다는 맹렬한 야심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3: 동냥그릇을 깨고 상단의 거상이 되다

    다음 날 동이 트기 무섭게, 왕초는 자신의 거처였던 다리 밑 공터에 거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웅성거리는 무리 앞에 선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헝클어졌던 머리는 정갈하게 묶어 올렸고, 누더기옷이지만 최대한 반듯하게 여며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빛은 과거의 독기를 넘어, 벼리고 벼린 시퍼런 칼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형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요?"

    눈치 빠른 부하 하나가 묻자, 왕초는 자신이 쓰던 깨진 동냥 바가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챙그랑- 하고 바가지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다리 밑을 날카롭게 울렸다.

    "나는 오늘부로 이곳을 떠난다. 더 이상 남이 던져주는 부스러기로 목숨을 연명하지 않을 것이다. 내 힘으로, 내 손으로 세상을 다시 살아볼 작정이다. 그동안 나를 따르느라 고생들 많았다."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거지들은 발칵 뒤집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렸으나, 왕초의 결심은 단호했다. 그는 수표교를 향해 깊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한 뒤, 미련 없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한양에서 가장 크고 거대한 상단들이 밀집해 있는 마포 나루터였다.

    마포 나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물산이 모여드는 투전판과도 같았다. 왕초, 아니 이제 다시 몰락한 도령으로 돌아온 그는 한강 변에서 가장 짐이 무겁고 품삯이 짠 객주에 막일꾼으로 들어갔다. 양반의 고운 손은 무거운 쌀가마니와 소금 가마니를 나르며 하루 만에 짓물러 터졌고, 어깨의 살가죽이 벗겨져 피가 배어 나왔다. 일꾼들의 거친 쌍욕과 객주 주인의 발길질이 날아올 때면 과거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북촌 대감댁 규수의 따뜻했던 눈동자를 떠올리며 모든 수모를 견뎌냈다.

    그렇게 묵묵히 짐을 나르던 어느 날 밤, 객주 안마당에서 술상을 뒤엎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상단의 대행수가 셈이 맞지 않는 장부 때문에 회계원들에게 불호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돌대가리 같은 놈들! 명나라에서 들여온 비단 백 필과 인삼의 교역비율이 어찌 이리 엉망이더냐! 당장 내일 아침까지 장부를 맞추지 못하면 다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행수가 노발대발하며 자리를 뜨자, 셈에 밝지 못한 회계원들은 사색이 되어 장부만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구석에서 짚신을 엮고 있던 도령이 조용히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 장부, 제게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일개 짐꾼의 말에 회계원들은 어이없어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부를 넘겼다. 도령은 붓을 들어 거침없이 산목을 튕기며 장부를 훑어 내려갔다. 양반 시절, 지루함을 달래려 읽었던 산학(수학) 서적들과 병법의 치밀한 계산 능력이 상업의 숫자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단 반 시진(한 시간) 만에 도령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은화와 엽전, 물품의 교환 비율 오류를 정확히 짚어내어 완벽한 새 장부를 만들어 냈다.

    다음 날 아침, 완벽하게 정리된 장부를 본 대행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셈을 일개 짐꾼 놈이 해냈단 말이냐? 당장 그놈을 내 방으로 들여라!"

    이 사건을 계기로 도령의 삶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대행수는 도령의 비상한 머리와 담대함, 그리고 글과 셈에 능통한 양반의 소양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는 도령을 짐꾼에서 서기로, 다시 물화를 거래하는 핵심 상인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도령은 물 만난 고기처럼 상업의 세계를 휘저었다. 가뭄이 들 것을 미리 예측해 곡식을 매점하고, 변방의 정세를 파악해 말과 비단 무역으로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한때 다리 밑에서 거지들의 식량을 배분하던 치밀한 통솔력은, 수백 명의 상단 일꾼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카리스마로 변모해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도령은 마포 일대에서 가장 현금이 많고 영향력 있는 거대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누더기를 걸쳤던 몸에는 명나라에서 들여온 최고급 비단옷이 감겼고, 땟국물이 흐르던 얼굴은 여유롭고 기품 있는 거상의 윤기가 흘렀다. 한양의 수많은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조차 그의 자금력을 빌리기 위해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비단옷을 입고 호화로운 자신의 저택 마루에 앉은 도령. 그는 조용히 허리춤에서 낡고 마른 밥풀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작은 천 조각을 꺼내 어루만졌다. 그것은 몇 년 전, 북촌 규수가 주먹밥을 건넬 때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의 귀퉁이였다.

    '기다리시오. 내 조만간 당신의 집 앞으로 당당히 찾아가, 당신이 내게 주었던 그 따뜻한 적선에 천 배, 만 배로 보답할 것이니.'

    도령의 시선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북촌을 향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도령이 미처 알지 못하는 거대한 비극의 그림자가 북촌 대감댁 위로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 4: 길거리로 내몰린 규수

    마포 나루터의 거상으로 자리 잡은 도령이 하루빨리 은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상단의 세력을 거침없이 확장하고 있던 그 시각, 한양 도성 북촌의 굳건하던 대감댁에는 파멸의 먹구름이 소리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언제나 사군자의 기품이 흐르고 은은한 매화 향이 감돌던 규수의 집안은,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온 꼿꼿하고 청렴한 선비 정신으로 조정 안팎의 깊은 존경을 받는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향한 맹수들의 탐욕이 핏빛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조정에서,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자의 자리는 늘 벼랑 끝처럼 위태로운 법이었다. 반대파 정적들의 치밀하고도 악랄한 모함이 마침내 독니를 드러냈다. 역모. 조선 땅에서 그 누구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가문의 씨를 말려버리는 가장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죄목이 대감댁의 지붕 위를 덮쳤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칠흑같이 어둡던 어느 깊은 밤, 고요하게 잠들어 있던 북촌의 정적을 날카롭게 찢으며 수십 명의 의금부 나장들이 피어오르는 횃불을 든 채 대감댁 솟을대문으로 짐승처럼 들이닥쳤다.

    "어명이다! 역적의 무리를 단 한 놈도 남김없이 포박하여 압송하라!"

    무서운 호령과 함께 도끼로 내려찍힌 육중한 대문이 처참한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평화롭던 기와집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곤히 잠들어 있던 하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맨발로 끌려 나와 흙바닥에 짓밟혔고, 평생을 대쪽 같은 지조로 살아온 규수의 아버지는 칼을 찬 관군들에게 무참히 멱살을 잡혀 결박당했다. 사당에서 철야 기도를 올리던 규수는 밖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에 놀라 얇은 속적삼 바람으로 마당을 향해 뛰쳐나왔다. 붉은 횃불 아래, 피투성이가 된 채 오라에 묶인 아버지를 발견한 그녀는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나장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버님! 이게 무슨 짓들이냐! 우리 아버님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으신 분이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을 어찌 이리 함부로 한단 말이냐! 제발 아버님을 놓아주십시오! 제발!"

    목에서 피가 나도록 부르짖는 절규가 밤하늘을 갈랐으나, 피도 눈물도 없는 나장들은 앙상하고 가녀린 규수를 발길질로 걷어차 팽개쳤다. 차가운 마당 구석으로 나뒹군 딸을 보며, 밧줄에 묶여 끌려가던 아버지는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를 흘리며 슬프고도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그것은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딸을 향한 가장 절박한 명령이었다.

    "살아야 한다. 내 딸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짐승 같은 꼴을 당하더라도 너의 목숨만은 반드시 부지해야 한다. 그것이 이 애비의 마지막 소원이다..."

    그 참혹한 당부가 이승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튿날, 아버지는 국문장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목이 내걸렸고, 평생 남편만을 하늘처럼 모시던 어머니는 그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대들보에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했다. 북촌에서 가장 으리으리하던 기와집 곳곳에는 붉은 압류 딱지가 흉측하게 붙었고,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한 가문의 고명딸은 관비로 끌려가 평생 노리개 취급을 받을 참혹한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평소 규수의 따뜻한 은혜를 입었던 늙은 유모가 목숨을 걸고 야밤에 관군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뒷문으로 빼돌려 도성 밖으로 도망쳤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길을 도망치는 험난한 과정에서 유모마저 화병과 과로로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고, 이제 세상천지에 남은 것은 철저히 혼자가 된 어린 규수뿐이었다.

    한때 눈부신 비단옷을 입고 은쟁반에 쌀을 담아 굶주린 이들에게 적선을 베풀던 고귀한 규수는, 이제 자신이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던 다리 밑의 거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처참한 처지가 되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관군들의 추포망을 피해 다시 도성 안 가장 낮은 저잣거리로 숨어든 그녀의 삶은 생지옥 그 자체였다. 찬 바람이 칼날처럼 뼛속까지 스며드는 혹독한 초겨울, 그녀의 얼어붙은 몸을 감싼 것은 여기저기 찢겨 누더기가 된 얇은 명주 치마 한 벌뿐이었다. 곱디고운 비단신은 도망치는 길에 진작에 다 해져 너덜거렸고, 짚신조차 신지 못한 맨발은 얼음장 같은 바닥에 긁혀 진물이 흐르고 퉁퉁 부어올랐다. 백옥처럼 눈부시게 희던 피부는 흙먼지와 시커먼 동상 자국으로 뒤덮여 본래의 얼굴을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한 푼만... 제발 한 푼만 적선 좀 해주십시오...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사옵니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목소리로 거리에 나가 깨진 바가지를 내밀어 보았지만, 세상의 인심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잔인했다. 역적의 딸이라는 소문이 퍼질까 두려워 옛 지인들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도 황급히 대문을 굳게 닫아걸었고, 시장통의 거친 왈패들은 얼굴에 진흙을 바른 그녀를 발로 걷어차며 조롱했다. 한때 수표교 다리 밑에서 도령이 겪었던 그 참담한 굶주림과 굴욕의 무게가, 이번에는 가녀린 규수의 어깨 위로 고스란히 짓눌러왔다. 먹다 남은 쉰내 나는 국밥 찌꺼기를 얻기 위해 시장통의 들개들과 흙바닥을 뒹굴며 다투어야 했고, 매서운 눈보라를 피할 곳을 찾지 못해 남의 집 차가운 처마 밑에 웅크려 밤새 언 손을 불며 덜덜 떨어야 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 순간 살점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아... 하늘이 어찌 이리도 무심하시고 잔인하신가. 아버님, 어머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 지옥 같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진도 더 숨을 쉴 수가 없사옵니다.'

    몇 번이나 언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 다짐했지만, 그때마다 귓가에 피맺힌 소리로 맴도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팽팽하게 부여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그 처절한 당부가, 벼랑 끝에 선 그녀의 숨통을 간신히 쥐고 억지로 호흡을 밀어 넣고 있었다. 하지만 양반가에서 곱게만 자란 육신의 한계는 이미 까마득한 끝에 달해 있었다. 모진 눈보라가 살을 에듯 휘몰아치던 어느 늦은 밤, 한양 종로 저잣거리의 인적 끊긴 캄캄한 뒷골목에서 결국 규수는 걸음을 더 이상 떼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하얗게 얼어붙어 터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백색 입김만이 희미하게 새어 나올 뿐, 몸은 이미 통각을 잃고 굳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의식은 점차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깊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차가운 눈송이가 감긴 그녀의 속눈썹 위로 소리 없이, 그러나 무겁게 쌓여가며 죽음의 장막을 덮고 있었다.

    ※ 5: 천금이 아깝지 않은 구원

    같은 시각,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는 수십 필의 진귀한 명나라산 비단과 번쩍이는 패물들이 산처럼 실린 거대한 수레 행렬이 북촌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선두에 선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가마 안에는, 마침내 수년 전의 그 맹세 같은 약조를 지키기 위해 금의환향하는 상단의 대행수, 도령이 타고 있었다. 최고급 호피가 깔린 푹신한 방석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소년처럼, 아니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비참한 다리 밑의 거지 왕초였던 시절, 수치심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죽어가던 자신을 구원해 준 그 한 줄기 빛 같았던 따스한 눈빛. 그 눈빛의 주인을 다시 만나면, 자신이 이룩한 천하의 모든 재물을 그녀의 발밑에 바치고 평생을 여왕처럼 호강시켜 주리라 수천 번, 수만 번도 넘게 어금니를 깨물며 다짐했던 터였다. 이 순간만을 위해 피를 토하며 장부를 맞추고, 잠을 줄여가며 상단을 일궈낸 그였다.

    그러나 부푼 가슴을 안고 그토록 고대하며 도착한 북촌 대감댁 앞의 풍경은, 도령의 끓어오르던 심장을 단숨에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웅장했던 솟을대문은 짐승의 이빨에 뜯겨나간 듯 처참하게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고, 높고 단단하던 담장은 여기저기 허물어져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부서진 문짝과 기둥 곳곳에는 '역모 적몰'이라 적힌 붉은 관아의 압류 딱지가 흉측한 부적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집 안은 사람의 온기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폐허 중의 폐허였다.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마당은 썩은 잎사귀들로 뒤덮여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맴돌았다.

    "이...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이 댁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 대체 이 집안에 무슨 비극이 닥쳤단 말이냐!"

    도령은 가마가 멈추기도 전에 짐승처럼 뛰쳐내려 지나가는 마을 노인을 다짜고짜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노인은 도령의 살기 어린 기세에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이고... 나리... 이 댁 대감마님께서는 억울하게 역모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셨사옵니다. 영감마님은 국문장에서 참수당하시고, 마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지요. 그 댁의 어여쁘던 고명딸은 관비로 끌려가기 전날 밤 도망을 쳤다는데... 이 매서운 겨울에 어디서 얼어 죽었는지, 산짐승의 밥이 되었는지 도무지 생사를 알 길이 없사옵니다요..."

    그 참혹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도령의 세상을 지탱하던 거대한 하늘이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그토록 죽어라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거상의 권력을 쌓았던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이유가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것이다. 눈앞이 새하얘지고 심장이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살아있어야 한다! 내 목숨을, 아니 내 상단의 모든 재물을 다 바쳐서라도 그 여인을 기필코 찾아내야 한다!"

    도령은 그 길로 즉시 상단 본거지로 말을 몰아 돌아가, 자신이 쥐고 있는 거대한 상단의 모든 조직망과 점조직을 총동원했다. 전국 팔도를 누비는 수백 명의 보부상들, 한양 바닥의 소식을 꿰뚫고 있는 모든 객주와 왈패들, 뒷골목의 기생들, 심지어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수표교 다리 밑의 거지패들에게까지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상금을 내걸고 규수의 행방을 미친 듯이 수소문했다.

    '내가 지옥의 불구덩이에 있을 때 당신이 그 고운 손으로 나를 구했소. 이제 당신이 그 지옥 밑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내가 세상을 다 불태우고 그 지옥을 때려 부수어서라도 당신을 반드시 꺼내오리다!'

    사흘 밤낮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한양 일대를 이 잡듯 뒤지던 도령에게 마침내 한 줄기 소식이 날아들었다. 종로 저잣거리 구석에서 옛 대감댁 규수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인이 눈밭에 쓰러져 얼어 죽어가고 있다는 다급한 전갈이었다.

    도령은 두꺼운 털두루마기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미친 사람처럼 말에 올라타 채찍을 휘두르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종로로 내달렸다. 얼어붙은 길 위에서 말이 몇 번이나 미끄러져 고꾸라질 뻔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뒷골목,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쓰레기 더미 곁에 한 여인이 웅크린 채 미동조차 없이 굳어 쓰러져 있었다.

    거칠게 말에서 뛰어내린 도령이 무릎이 깨지는 것도 모른 채 바닥으로 슬라이딩하듯 다가가 겹겹이 쌓인 눈 더미를 파헤치고 여인의 앙상한 몸을 안아 올렸다. 땟국물과 시퍼런 동상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체구. 그러나 도령의 영혼은 단숨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헝클어져 엉겨 붙은 머리칼 사이로 흐릿하게 남아있는 그 고귀하고 기품 있던 초승달 같은 눈썹, 그리고 부패한 쓰레기 냄새 속에서도 기적처럼 옅게 피어나는 그 은은한 매화의 흔적. 자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던 그 여인이 틀림없었다.

    "낭자...! 낭자! 제발 눈 좀 떠보시오! 내가 왔소,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하오! 제발 나를 보시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처절한 오열이 뒷골목을 울렸다. 도령의 눈에서 끓는 물 같은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려 규수의 얼어붙은 뺨과 입술을 흠뻑 적셨다. 도령은 주변을 지나치던 사람들의 기이한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입고 있던 값비싼 비단 겉옷을 훌렁 벗어 그녀의 꽁꽁 언 몸을 겹겹이 감싸 안았다. 자신의 끓어오르는 체온과 심장 소리가 그녀의 멈춰가는 심장에 닿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으스러지도록 꽉 품에 안았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려던 규수가 도령의 뜨거운 눈물과 살갗의 온기에 아주 희미하게,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초점이 없는 흐린 시야 속에서 자신을 껴안고 세상을 잃은 듯 통곡하는 낯선 사내의 얼굴을 보며, 규수는 그것이 저승사자이거나 자신이 죽기 직전에 만들어낸 환영일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도령은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하늘을 향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내 상단의 모든 말을 대령하라! 이 세상 팔도의 모든 명의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끌어모아라! 천 년 묵은 산삼이든, 명나라 황제의 약재든 내 상단의 전 재산과 창고를 다 비워서라도 이 여인을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 만약 이 여인의 털끝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내 이 세상을 모조리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가장 천하고 냄새나는 다리 밑에서 시작된 한 사내의 지독하고 맹렬한 순애보가, 마침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친 여인의 썩어가는 동아줄을 붙잡아 끌어올리는 찰나였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종로 거리의 눈보라도, 도령의 품 안에서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거대한 생명의 불꽃을 결코 꺼트릴 수 없었다.

    ※ 6: 오래된 약조를 이룬 해피엔딩

    끝을 알 수 없는 캄캄하고 깊은 늪 속에서 허우적대던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 오르고 있었다. 규수가 납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을 때, 그녀의 오감을 맞이한 것은 뼛속을 갉아먹던 혹독한 추위와 썩은 내가 진동하던 뒷골목의 쓰레기 더미가 아니었다. 넓고 아늑한 방 안은 한겨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훈훈하고 따뜻한 온기가 온돌을 타고 감돌았고, 코끝에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최고급 침향이 고급스러운 향로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상으로 갈라져 피가 맺혔던 피부 위에는 상처를 낫게 하는 진귀한 연고가 꼼꼼히 발라져 있었고, 지친 몸을 덮고 있는 것은 구름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최고급 명주 이불이었다.

    '여기가 이승인가... 아니면 저승의 문턱인가... 아버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거두어 주신 것인가...'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규수가 몸을 일으키려 비틀거리는 순간,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화려한 남색 비단옷을 입은 훤칠한 사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약사발을 들고 다급하지만 정중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큰 키에 넓은 어깨, 반듯하게 빗어 넘긴 상투와 여유롭고 기품 있는 자태. 과거 수표교 다리 밑에서 악취를 풍기며 웅크리고 있던 거지 왕초라고는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다른, 압도적인 거상의 모습이었다.

    "아직 일어나시면 아니 되오. 의원이 이르기를 몸속에 아직 찬 기운이 깊게 남아 있다 하였소. 부디 자리에 누워 먼저 이 따뜻한 탕약부터 드시지요."

    사내의 한없이 다정하고 애틋한 목소리에 규수는 이불자락을 꽉 쥔 채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대체 어디이며, 나리께서는 뉘시옵니까. 어찌하여 죽어가는 이름 모를 천한 몸을 이리 거두어 주시고 과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옵니까."

    도령은 규수의 물음에 침대맡에 약사발을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이내 그 화려한 비단옷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수십 개의 상단을 거느리고 한양 상권을 쥐고 흔드는 천하의 거상이, 한낱 몰락하여 누더기를 걸친 여인 앞에 가장 낮고 겸손한 자세로 엎드린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속 가장 깊고 안전한 곳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내어 규수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화려한 패물도, 값비싼 비단도 아니었다. 끝자락이 거칠게 찢어지고 빛이 바랜 낡디낡은 천 조각. 그 위에는 오래전 말라붙어 화석처럼 굳어버린 밥풀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규수가 거리에 나앉은 거지에게 쌀주먹밥을 얹어줄 때, 그 거친 손결에 찢겨 나갔던 바로 그녀의 수건 귀퉁이였다.

    그 천 조각을 확인한 규수의 두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리며 초점을 잃었다.

    "이, 이것은... 설마... 아아..."

    "기억하십니까. 몇 해 전 모진 봄바람이 불던 그날, 북촌 대감댁 앞에서 며칠을 굶주려 짐승처럼 죽어가던, 누구도 사람 취급하지 않던 거렁뱅이 왕초에게 그 고운 손을 내밀어 주신 날을 말입니다. 당신의 그 다정하고 맑은 눈빛 한 번이, 시궁창에 처박혀 세상을 저주하던 저를 다시 호흡하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날 이후 단 하루도, 단 한 순간도 낭자를 제 마음속에서 지운 적이 없사옵니다."

    도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과거 자신의 가문이 억울하게 멸문지화를 당해 길바닥의 거지가 되었던 일부터, 그녀의 온정에 각성하여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간 과정, 그리고 오직 그녀를 다시 만나 온 세상을 다 바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악착같이 재물을 모아 상단을 일으킨 그 길고도 험난했던 모든 시간을 담담하지만 뜨겁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규수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이불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자신이 지나가듯 무심코 베풀었던 그 작은 쌀밥 한 덩이의 온정이, 억겁의 시간과 혹독한 시련의 강을 건너 가장 참혹하고 외로운 순간에 자신을 구원하는 거대한 동아줄이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정말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제가 낭자의 목숨을 구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낭자께서 이미 오래전 제 썩어버린 목숨과 영혼을 구원하셨으니, 저는 그저 제가 낭자께 진 빚을 천만 분의 일이나마 돌려드렸을 뿐입니다."

    도령은 눈물을 흘리는 규수에게 다가가, 상처투성이가 되고 거칠어진 그녀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자신의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굳은살의 감촉이 그녀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낭자의 훌륭하신 아버님께서 억울하게 쓰신 역모의 누명은, 내 상단이 가진 모든 재물과 조정의 인맥을 동원하여 반드시 벗겨드리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아 드릴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무서운 길바닥에서 굶주리며 떨지 마십시오. 평생 낭자의 그 고운 발에 흙 한 톨 묻지 않게, 제 모든 영혼과 목숨을 바쳐 당신을 지키고 또 모실 것입니다. 부디... 모자란 저의 아내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도령의 절절하고 진심 어린 고백에, 참고 있던 감정이 둑 터지듯 터져버린 규수는 소리 내어 오열하며 그의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고 무너져 내렸다. 지난날 가족을 잃었던 끔찍한 고통, 거리를 떠돌며 당했던 수모와 굶주림, 그리고 차가운 눈구덩이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그 모든 두려움의 눈물이 도령의 따뜻한 가슴 속에서 봄눈 녹듯 스르르 흘러내려 사라지고 있었다. 도령은 흐느끼는 그녀의 등을 꽉 끌어안으며 조용히 자신의 눈물도 함께 흘려보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봄꽃이 만개한 한양 도성에는 조선 개국 이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혼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도령의 거침없는 자금력과 정보력 덕분에 규수의 아버지에게 덮어씌워졌던 모함의 증거들이 낱낱이 밝혀져 아버님의 억울한 누명은 완벽하게 벗겨졌고, 멸문지화를 당했던 대감댁의 명예는 다시 높게 세워졌다. 복사꽃과 벚꽃이 흩날리는 종로 거리를 따라, 수십 명의 상단 호위무사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최고급 비단과 화려한 장식이 달린 거대한 꽃가마가 행진했다. 가마 안에는 예전보다 더욱 아름답고 기품 넘치는 비단 원삼을 입은 규수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고, 가마 곁에서 털기 고운 백마를 탄 늠름한 옥골선풍의 도령은 연신 가마 안의 그녀를 돌아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시궁창 밑바닥의 거지 왕초와 하늘처럼 높았던 몰락 양반 규수. 운명의 수레바퀴가 두 사람의 위치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지만, 가장 캄캄하고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유일한 빛이 되어준 두 사람의 기적 같은 순애보는, 오랫동안 조선 팔도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어두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전설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유튜브 엔딩멘트

    가장 비참한 순간 베풀었던 작은 친절이, 훗날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거대한 기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의 본질을 바라본 규수와, 은혜를 잊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친 도령의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나요?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다음에도 더 흥미로운 조선의 숨은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